[거리로나온책]‘존재 증명’에 동참하여 읽기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 《숫자가 된 사람들》(67호)

2015년 9월 22일culturalaction
[거리로나온책]67호
 
 
‘존재 증명’에 동참하여 읽기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 《숫자가 된 사람들》
양똘
‘평화’가 뭘까. 이 주제로 각자 책을 들고 모였던 적이 있다. 모인 사람들 수만큼이나 다양한 정의와 그에 걸맞은 책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중년·노년 여성들이 가난 때문에 학업을 잇지 못했던 지난 삶에 대해 직접 쓴 시집을 가져갔다. 평화는 ‘누구나 자기 목소리로 자기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서였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나한테 가장 큰 위협으로 다가오곤 하는 것은 주로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었다. 내 일상과 감정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을 때, 제대로 설명할 수 없거나 애써 설명하면서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 때, 내 속은 말 그대로 ‘전쟁통’이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이상, 나에게 평화란 영영 없는 셈이었다.
그런데 ‘말하지 못한다’는 표현은 언뜻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무언가 숨기고 있다. 왜 말하지 못하는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실은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해선 안 되는 것을 결정짓는 누군가가 말이다. 이렇듯 말이 곧 권력의 문제라는 것이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아니다. 우리는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천지차이의 파급력을 발휘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의 같잖은 한마디는 신문 1면을 도배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지만,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건 한마디는 발화되었는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 없이 금세 휘발되어버린다. 누군가의 소소한 경험담은 거창한 교훈으로 탈바꿈해 오래오래 전해지지만, 또 다른 누군가의 처절한 경험담은 그저 나와 관계없는 끔찍한 얘기, 지나간 사건으로 사라져갈 뿐이다. 아니, 이 모든 결과 이전에 일단 말을 하는 것, 진실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당장 죄인이 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때 죄를 부여하는 자들이 누군지 떠올려보면, 확실히 말에는 권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생환자들의 말마디를 복원하다
《숫자가 된 사람들》(오월의봄, 2015)은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열한 분의 이야기를 인권기록활동 작가들이 ‘구술’ 형식을 바탕으로 담아낸 작업물이다. 사실 형제복지원 사건 자체는 유명한 TV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서, 여러 언론 보도를 통해서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다. 어떤 사건인지 궁금하다면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형제복지원’이라고 써넣기만 해도 주요 정보들이 쭉 펼쳐진다. ‘형제’‘복지’라는 훈훈한 이름으로 사실상 강제수용소가 운영되었던 것, 거기서 어떤 가학 행위들이 있었고 몇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 형제복지원 원장은 겨우 2년 6개월 징역을 살고 나왔고 대를 이어 ‘사회복지사업’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런 사실관계들을 아무리 반복해 읽어도 이 사건은 도통 피부로 와 닿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지옥이란 게 있다고 치자. 지옥의 설계도나 구조도 따위를 백날 들여다봐야 그 끔찍함을 조금이라도 간접경험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곳에서 살아나온 사람의 한마디다. 우리는 그 실낱같은 말마디를 붙잡고서야 겨우겨우 거대한 비극의 내부를 살짝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비극은 진즉에 매장될 것이고, 다른 듯 닮은 얼굴로 우리를 다시 찾아올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팀은 그 소중한 말마디를 복원하는 역할을 했다.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한곳에 ‘치워져야’ 했던 존재들, 스스로 말할 수 없었던 시간들, 형언하는 것이 고통일 만큼의 극한 고통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삶, 아직도 견고한 사회 내부의 벽과 분리통치에 꽉 막혀 있는 목소리가 세상에 나오게 도왔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형제복지원’이 대중의 눈앞에 제대로 ‘재건’되어야 했다. 피해생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비슷한 듯 다른 경험이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되면서 비로소 진짜 형제복지원의 전모가 드러났다.
‘사회 정화’라는 숙원사업
형제복지원의 전모, 뭐였을까 그게.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 그것은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이 책을 한 꼭지나마 꼭 읽어보길 권하고 싶은 이유가 그것이다. 이 충격은 단순히 그 안에서 고문과 다를 바 없는 학대가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어린이들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남자 소대에서는 소대장이 성폭력을 일삼기도 했다는 등 정황상의 끔찍함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형제복지원을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들―그곳에 어떻게 잡혀왔고, 그 안의 시스템이 어떻게 유지됐으며, 풀려난 이후에 어떠했는지―이 별로 낯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받은 충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형제복지원’은 세간의 기대와 달리 현실과 유리된 별세계 같은 것이 아니다. ‘형제복지원’이라는 고유명사를 작은따옴표 안에 묶는 게 당치 않게 느껴질 만큼, 그것은 우리 세계와 긴밀히 이어져 있었다.
국가는 1975년 내무부 훈령 제410호을 발령해 소위 ‘부랑인’ 단속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이 훈령에 따르면 “일정한 정주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터미널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해하는 모든 부랑인”(제1장 제2절)이 단속 대상이 되었다. 이걸 요즘 상황에 비추어 다시 풀이하면 이렇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지하철역 안이나 공원 벤치에 추레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노숙인, 간혹 상점 안에까지 들어와서 손님들에게 껌을 사라고 불쑥 내밀곤 하는 껌팔이, 지하철역 계단에 무릎을 꿇고 온몸을 수그린 채 거무튀튀한 두 손만을 벌리고 기다리는 걸인……” 이 모든 이들은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해하”기 때문에 한곳에 격리해서 갱생시켜야 한다. 이것을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 지금도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사회 정화와 질서를 염원하는 지배층에게는 매력적인 숙원사업이 아니겠는가.
그보다 더 서늘한 것은 스스로 적어도 노숙인은 아니라고 안도하는 우리 또한 그러한 숙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피해생존자 김희곤 씨의 “가난하고 힘없고 누추한 사람들은 다 제거 대상이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은, 마구잡이 부랑인 단속을 명령한 국가권력과 머릿수당 인간장사를 한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묵과한 시민사회에도 마땅히 던져져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형제복지원의 담 바깥을 넘어서 우리 사회 전체에 여전히 매우 유효하다. 사회복지시설이라는 미명 아래, 갱생이나 훈련, 때로는 재활이나 요양이라는 명분으로 약자 또는 소수자를 사회에서 격리하는 일은 지금도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소위 ‘부랑인’의 이미지에 해당되지도 않는, 즉 집과 가족이 있고 행선지도 명확했던 이들까지 무차별로 형제복지원 단속차에 태워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왜 멀쩡한 사람들을 잡아가, 잘 알아보고 잡아가야지”라고 반응한다면, 웃프게도 이 책과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오히려 영영 멀어지는 일이 되어버릴 터이다. 말 그대로 행선지가 없는 이들이라고 해서 한곳에 갇혀야 할 까닭이 있는가? 형제복지원을 제대로 알려면, 그리고 그 피해자들의 삶을 지금이라도 받아들이고 사회적 치유를 제공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부랑인이란 대체 누구인가’ 하고 근본적인 것부터 다시 물어야만 한다. 필요에 따라 부랑인을 만들어내는 이들, 그 격리를 이용해 돈과 힘을 챙기는 이들의 면면을 똑바로 보고, 그들에게 책임 추궁의 화살을 겨눠야 한다.
‘기록’의 힘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책에는 어릴 때 집을 잠깐 나왔다가 잡혀간 아이들의 사례도 있지만, 분명히 일찍이 부랑인으로 낙인찍혀서 오래도록 떠돌아야 했던 어른들의 사례도 있다. 생의 기억이 집이 아니라 시설에서 시작되는 이들.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내 세 살 때 발생된 걸로 추정한대요”라고 설명하는 피해생존자 김영덕 씨 경우처럼 말이다. 태어남에 대한 증명이랄까, 확인이 불가능했던 김영덕 씨는 그저 서류에 서류를 찾아가며 자신이 처음에 어디서 발견되어 어디로 보내졌는지 스스로 추적해가는 지난한 작업을 해왔다. 자신이 어딘가에 버려진 것은 ‘사건’에 해당했기에, ‘태어났다’의 자리에 ‘발생했다’를 넣을 수밖에 없었던가보다. 하지만 발생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그 발생 경위를 밝혀내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무연고자’들의 발생 또한 다 찾아내주고 싶다는 꿈을 꾼다.
오늘날 우리가 보통 거추장스럽고 갑갑하게 생각하는 주민등록증을 비롯한 신분증, 서류 같은 것들이 그에게는 절실한 존재 증명이었던 셈이다. 물론 인간이 서류로 증명되어서는 안 되는 게 맞다. 아니, 서류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흔히 말하는 ‘인간 존엄’일 터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그 최소한의 존엄마저 빼앗긴 사람들, 어딘가에서 발생해서 물건처럼 몇 번이고 옮겨져야 했던 사람들이 충실한 ‘기록’의 힘으로나마 다시 ‘출생’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 책도 결국은 그러한 희망에서 쓰여졌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가는 일은 그 희망에 동참하는 일이다. 조금 무섭게 들릴 테지만, 우리의 독서는 사장될 위기에 처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할 힘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라면, 책은 힘이 세다.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Prev Post Next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