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다방]<이갈리아의 딸들> 남자들이 쉽게 하는 말 중에 “나는 그런대로 여자친구한테 잘 해주는 편이야.”라는 헛소리들이 있다.(30호)

2013년 12월 4일culturalaction
[책다방]30호
<이갈리아의 딸들>, 남자들이 쉽게 하는 말 중에
 
“나는 그런대로 여자친구한테 잘 해주는 편이야.”라는 헛소리들이 있다
김영민
여성운동은 가장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사회 운동의 하나로 꼽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대한민국에서 여성대통령이 선출되었지만 여성대상범죄 – 2011년 48만2천674건에서 지난해 58만1천28건으로 9만8천354건(20.4%) 증가했다.(2013년 10월 11일, 연합뉴스 보도) – 는 사그라들 줄 모르고 있다. 나는 여성대상범죄가 많다는 것은 사람들 마음속에 ‘여성은 사회적 약자로서 그 지위가 낮다.’는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사회, 문회적으로 보다 개방적인 북유럽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모습은 1975년에 노르웨이에서 쓰여진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상세히 묘사 되어있다. 책에 나오는 이갈리아의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여성, 남성의 역할이 뒤바뀐 판타지소설과 같은 느낌을 전해주지만 소설 속 사회구조나 문화양식 및 사람들의 인식 등은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주인공인 페트로니우스라는 ‘맨움(manwom)’이 ‘움(wom)’들만이 할 수 있는 작살물어라는 물고기 잡이가 되고 싶어하면서 내용이 진행된다. 마치 예전 바다사람들이 ‘배에 여자가 타면 재수가 없다는.’는 미신 -지금도 원양어선에서는 ‘여자가 배를 타면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미신으로 여자를 배에 태우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고 한다.- 을 믿었던 것처럼 맨움은 물고기를 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맨움용 잠수복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정치인인 페트로니우스의 어머니 루스 브램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움용 잠수복을 만들고 자신의 아들이 잠수부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진정으로 이해를 한다기 보다는 철없는 아들의 한 때라는 생각에 그치고 만다. 이러한 내용의 골자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마치 현실의 우리 아버지들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페트로니우스는 사랑하는 움인 그로와 그의 아버지로 부터도 이해를 받지 못한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의 ‘맨움’들은 남성스러워야하고 수동적이며 쉽게 무시당하고 때론 아내에게 맞기도 하고 쉽게 -소설 속에서 ‘움’들이 마음을 먹고 주인공인 페트로니우스를 겁탈하기까지가 크게 어렵지 않았음을 표현한 것이다- 겁탈당하기까지 한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성폭행이나 성추행의 공포를 느껴보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여는 여성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두려움 혹은 더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성추행의 경험을 들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마치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이야기를 듣는 듯 했고 내가 살아온 세계와 너무도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이 여자와 남자가 사는 세상의 차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면에서 많은 남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우리는 남자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편안하게 살았는지? 때로는 얼마나 거칠었는지 혹은 왜 거칠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를 자신이 머리를 곱게 땋고 페호(소설 속 남성이 성기를 가리기 위해서 착용하는 현실에서 여성이 착용하는 브래지어와 비슷한 용도의 속옷)를 입고 온 몸의 털을 제모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여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주변의 남자들이 쉽게 하는 말 중에 “나는 그런대로 여자친구한테 잘 해주는 편이야.”, “나는 여자들한테 진짜 잘 해주는데 왜 여자친구가 안 생기지?”라는 헛소리들이 있다. 이 세상에 당신이 잘 해주길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능동적으로) 해주는 무언가를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대상으로 간주해버리는 이러한 표현에는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이 깃들어 잇다. 나는 배낭여행을 다니면서 남자가 여자의 배낭을 들어주려고 할 때, 거부를 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화를 내는 여자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거리에서는 반대의 경우를 더 자주 보게 되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페트로니우스는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맨움해방주의자’ 모임을 만들게 된다. 그들은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면서 움에게 종속된 것처럼 살아가는 맨움이 아닌 독립적이고 존중받는 존재로서의 맨움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사회적 인식 속에 갇혀서 맨움으로서는 할 수 없던 물고기 잡이뿐만 아니라 농사일도 해나간다. 이들이 인지한 문제점에 대해서 자신들끼리의 논의에 그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하고 페호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 메시지를 사회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들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노력들은 결실을 맺어 국가 맨움 주간이 선포되는 결과를 낳고 사회적인 인식도 조금은 변한 듯해 보인다.
하지만 소설의 끝 부분에서 페트로니우스의 어머니인 루스 브램은
맨움은 생명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단다. 그들은 자손과 육체적 연결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죽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단다. 맨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땅의 생명이 죽어 없어질거야. 만일 맨움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만일 맨움이 제제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교화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그들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생명은 소멸할거다…
라고 말한다. 위의 글에서 몇 가지 단어만 바꾸면 모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언어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로빈슨 주교의 두가지 사랑’이라는 퀴어영화ㅡ동성애자의 권익을 보호하거나 동성애를 주제로 다룬 영화ㅡ를 보고 왔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에서 만난 변영주 감독은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의 반증으로 상대적, 사회적 지위가 약한 자들을 공격한다.”고 말한다. 그 사회적인 약자는 이 영화에서는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 혹은 양성애자이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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