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를 이해하기 위하여]204호(30호)

2013년 12월 4일culturalaction
[JPG를 이해하기 위하여]30호
204호
임효진
우리집은 한번도 케이블티비를 신청한 적이 없다.
가끔 보면 운좋은 애들은 옆집 안테나의 오지랍으로 다채널의 수혜를 받기도 하던데
우리집은 에스비에스에서 이비에스로의 무한루핑,
5개 채널로도 하루종일 티비앞에 앉아있는 애한테 케이블까지 달아주면
사단이 나겠구나 지례짐작한 엄마의 계산은 틀렸다.
원래 사람은 뭐든 질릴때까지 해봐야 안다.
어설픈 욕망이야 말로 만성이 되기 쉽다.
(이런 나의 막연한 동경이 지금까지도 신문을 볼 때 강박적으로
편성표페이지를 탐독하는 습관으로 남은 것은 좀 귀여운거 같다. )
중고등학교때는 오씨엔이나 엠티비같은 채널이 일상인 애들이 너무 부러웠다.
내가 모르지만 좋아할게 분명한 세계가 거기 있었다.
13번 너머에는 사람을 세련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섹스앤더시티 얘기를 하는 중2는 좀 달라보였다.
나는 결국비디오가게엘 가서 섹스앤더시티를 빌렸다. 모르는데 아는척하는 것에 지쳐갈 쯤이었다.
물론 이건 티비가 모든 최신을 송신해주던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방송을 컴퓨터로 스마트폰으로 언제든 다운받아 볼 수 있으니까 꼭 방송시간에 티비앞에
앉을 필요도, 케이블채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자격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모든길은 중국으로 통한다고 중국사이트에서 본방이 끝나는 시간과 거의 동시에 드라마를 업데이트해준다.
티비도 달라졌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송신 방법이 바뀌었다고 했다.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니까 시계같은 거라고 해두자.
아날로그건 디지털이건간에 둘 다 보여주는 정보는 같은 이치로.
아무튼간에 그 시절 나는, 케이블채널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비디오가게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고 EBS에서 해주는 또래의 재미와는 거리가 먼 방송들에도 정을 붙였다.
지루함을 이겨내고 얻은 긍정적인 반향에도 불구, 내게는 여전히 일종의 컴플렉스같은 것이 남아있다.
이건 거실에 쇼파가 있는 집에 놀러갔을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어떻게 앉는게 멋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건지 몰라 매번 못 앉고 서 있다가 남이 앉을 때 따라앉는 거다.
근데 막상 가져보니 쇼파라는게 정말 의자 이상의 의미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허탈해졌던 경험.
작년에 학교앞 고시원에서 3개월짜리 자취를 시작했을 때 무엇보다도 나는, 처음으로
5개 이상의 채널이 나오는 티브이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설렜다.
B4용지 만한 티비가 무려 70번대가 넘어가는 채널을 보유하고 있었다.
리모콘이 없는 것이 흠이 었지만 괜찮았다.
침대에 누워 발을 뻗으면 채널 이동 버튼에 엄지발가락이 닿았으니까.
나는 그 해 가을과 겨울, 학교외의 시간들을 온전히 그 티비 앞에서 보냈다.
어머니에게는 비밀인 이 사실을 나는 사진폴더를 뒤져보다가 깨달았다.
모든 사진들이 광각렌즈로 으그러진 정사각형의 좁은 방 안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사진 속 티비는 언제나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다.
문을 여닫는 소리와 어둠속에서 실내화를 끄는 규칙적인 리듬, 지나가는 자리에 남은 계란후라이냄새 정도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아주 점잖은 여대생이 20명 가량이 입주해 있는 신축 건물은 학생회관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는 친구끼리 처음부터 같이 입주를 한 게 아닌 이상 서로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해야한다는
 암묵적인 철칙같은 게 있었다. 드러내는 것이 예의와 반대된다고 배운적 없는데 우린 자꾸 숨었다.
복도 불이 켜지자 꼬리를 잡힐 까 계단을 달음박질 하는 윗층 여자의 실내화는 내것과 같았다.
김애란의 단편소설이 자주 생각났다.
옆방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콘센트를 꼽거나 혹은 뽑을 때의 벽의 진동에 자세를 바로잡으며
나는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티브이 소리마저 완전히 잦아드는 새벽3시,
음소거된 티비에서 ARS로 사주를 봐주는 무당의 입을 보며 잠이 드는 날이 많았다.
질릴 때까지 티비를 보고나서 내가 깨달은 것은
케이블채널이라는 것이 돌리는 순간-찰라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때가 별로 없으며(대게가 광고중이니까)
채널의 수와 삶의 질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선택이 가끔은 매우 피곤하게 느껴진다는 것,
그래서 결국 보게 되는 채널은 10개 안팍이라는 덤덤한 결론이었다.
그래도 그 때 참 재밌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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