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로운 덕후의 우울]여성 친화적인 포르노 그리고 섹스(30호)

2013년 12월 4일culturalaction
[잉여로운 덕후의 우울] 30호
여성 친화적인 포르노 그리고 섹스
최지용
이 글은 꼭 쓰고 싶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정말 잘 쓰고 싶었다. 부끄러운 글 솜씨지만 이 글이 사랑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를 감히 바란다. 미의 여신이자 성과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비너스)는 피그말리온이 조각한 여인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사랑의 행위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을 만큼 무한한 창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글이 계도를 하려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다소 그런 목적으로 이 글을 썼다. 물론 이 글에서 하는 모든 이야기가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의 몸을 맞대고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에 정답은 없다. 다만 이 글이 다른 상상을 위한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뻔하고 유치해보일 수 있는 질문으로 시작을 해보자. 사랑과 섹스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사랑 없는 섹스, 섹스 없는 사랑은 가능한가? 이런 유치하고, 이분법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질문이 이 글을 읽는 것을 그만두고 싶게 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참고 더 읽어주길 바란다. 사실 사랑이란 게 우리가 정의를 내리고 한정할 수 있을 만큼 단일한 의미와 맥락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섹스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사랑이 없는 섹스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랑은 매우 광범위한 맥락을 지니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 없는 암묵적으로 계약된 둘만의 배타적인 관계로 사랑을 한정시키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사랑을 좀 더 넓은 의미로 본다면, 사랑이 없는 섹스는 매우 좋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가능성이 크다.
많은 여성들이 포르노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대부분의 포르노에는 사랑은 없고 오로지 섹스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포르노에 등장하는 두 사람(때로는 여러 명)은 자신의 성기를 모든 행위의 중심으로 삼는다. 그 행위에서 상대방과의 교감이나, 서로에 대한 배려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는 오로지 자기 성기의 신경세포를 자극시켜줄 도구적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포르노에서 행위의 중심은 남성이다. 전희는 남성이 삽입을 하기 전의 준비단계일 뿐이며, 카메라의 앵글은 남성의 시점에서 움직인다. 여성의 가슴과 엉덩이는 지나치게 부각되며, 여성의 신체는 시각적으로 남성을 흥분시켜주는 도구이다.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자화 된 몸이다. 여성의 신음소리는 너무 과장되고 부자연스러우며, 남성의 성기가 삽입된 순간부터 여성은 절정에 이른 듯이 표정을 짓는다. 20분에서 30분 사이의 섹스 과정은 모두 남성이 사정을 하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한 것이다. 남성이 사정을 하는 순간 두 사람은 모든 것이 만족되었다는 표정을 짓고 영상은 끝을 맺는다.
요즘 한참 화제가 되고 있는 TV 프로그램, JTBC의 <마녀사냥>에서 야동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간 적이 있다. 출연진인 모델 한혜진은 “여자들은 스토리만 있으면 된다. 남자들이 보는 야동은 스토리가 없다. 스토리가 중요하지도 않고.”라고 말했다. 그런데 정말 스토리만 있으면 되는 것일까? 한혜진이 어떤 맥락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인지 이해가 되긴 한다. 성관계 전후의 맥락을 이어주는 내러티브는 영상에 등장하는 남녀 두 사람 사이에 정서적 공감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스토리가 있더라도 섹스 그 자체에서 정서적 교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좋은 섹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섹스를 하는 행위 자체에서 가공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진짜 정서를 느낄 수 있다면, 굳이 스토리를 만들어 붙일 필요가 없다.
미국의 포르노 산업 규모는 엄청나게 크고 다양한 포르노들이 존재한다. 그중 어떤 포르노 제작사들은 여성과 커플 친화적인 포르노를 표방하고 있다. (그 제작사가 어디인지 알려드리고 싶으나, 공개적인 지면이라 언급할 수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글쓴이의 이메일(hohobangguy@hanmail.net)로 문의하시면 개인적으로 알려드리도록 하겠다.) 그중 한 제작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we believe that sex is beautiful and endeavor to create unique and passionate pornography, capturing real feelings and genuine intimacy.”라고 쓰여 있다. 번역해보자면 이렇다. “성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서적 교감과 진실한 감정을 포착하여, 독창적이고 열정적인 포르노그라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제작사에서 만든 영상들을 보면 다른 포르노그라피에 비해 성관계시의 진짜 감정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포르노에 비해 낫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대안이 되기는 힘들다. 몇몇 포르노 배우들은 기존의 포르노에서 보여주던 과장된 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카메라 워킹은 여전히 남성의 시각에 치우쳐있고, 남성의 사정이 섹스의 종점으로 묘사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 친화적인 포르노를 제작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좀 더 깊이 있는 고민과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글쓴이는 포르노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르노에도 나쁜 포르노가 있고 좋은 포르노가 있는 것이다. 좋은 포르노가 제작되고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어떤 것이 좋은 섹스이고, 섹스 시에 어떻게 감정을 교류해야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좋은 섹스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교육 시간에 “성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선생님들은 말하지만, 그들이 성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그들에게 성행위는 어느 정도 숨겨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며, 청소년들의 성행위는 웬만하면 막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성은 다분히 생식 중심적이다. 마치 성행위의 목적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아기가 만들어지는 데 있는 것처럼 말한다. 성행위 그 자체의 즐거움, 섹스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섹스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서로의 몸을 더듬고 온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그것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지면을 빌려 감히 급진적인 주장을 하나 해본다. 좋은 야동을 만들고 그것을 청소년들과 함께 보자.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좋은 섹스의 감각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자기 몸의 감각에 집중하여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온몸 구석구석의 신경을 깨우는 일,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타인의 감각을 느끼고 상대방의 온몸 신경을 자극하는 일, 서로 몸을 맞대어 사랑을 나누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일종의 황홀한 체험을 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섹스는 숨기거나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창조적인 행위이다. 모두들 즐거운 섹스를 하시기를 바란다. 여러분들의 삶이 아프로디테의 황금빛으로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좋아하는 뮤직비디오 하나를 첨부한다. 영국 뮤지션 Mika의 ‘Make You Happy.’
추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야기만 더 하고 끝내겠다. 남성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다. 사정은 섹스에서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섹스 시 사정을 꼭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새로운 문이 열릴 것이다. 사정을 하든 말든, 삽입을 하든 말든 그건 섹스 전체 과정에서 그다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애무만 두 시간을 해도 상관없고, 삽입을 하더라도 사정을 안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정을 했다 하더라도 섹스를 끝낼 필요는 없다. 계속해서 애무를 해도 된다. 섹스에서 사정 중심주의를 버리자. 그러면 온몸의 다른 감각들을 잠에서 깨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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