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방]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 활동가(68호)

2015년 10월 16일culturalaction
[길다방]68호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 활동가 
인터뷰 : 강효주
활동가로 이끈 유년시절의 이미지
 저마다 그런 장면이 있다.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는 유년시절의 이미지. 이런 이미지는 삶의 경로에 영향을 끼친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다. 현재는 과거의 미래다. 그렇다. 유년시절에 각인된 어떤 이미지는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한다. 나영도 그런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다. 그 유년시절의 이미지는 그를 활동가의 삶으로 이끈다.
“처음으로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종각 옆 종묘인가, 거기서 본 장면 때문이에요. 그곳은 포장마차들이 모여 영업 하던 장소였어요. 저는 어느 날 오후 5시쯤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어요. 포장마차들이 영업을 시작하려고 준비하던 참이었는데, 철거단속반이 뜬 거예요. 하얀색 트럭을 타고 온 하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느 포장마차를 강제로 부수면서 트럭에 그 잔해를 싣는 거야. 포장마차 주인은 청각장애인 여성 분이었어요. 그 분이 말도 못하고 철거단속반의 하얀 바지가락을 붙잡고 울부짖으며 땅바닥을 기다시피 매달리셨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포장마차 주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막 철거하는 거예요.”
 나영이 활동가의 삶을 산지 벌써 18년째다. 중견 활동가의 근속연수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는 나이듦에 상관없이 자기가 발 딛고 있는 영역에서 신나고 재미나게 활동하려한다. 그는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 때문에 긴 시간 사회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호기심에 끌려 걸어온 그의 사회운동은 ‘학생운동-교육/문화운동-페미니즘/퀴어운동과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운동’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는 각 시기를 과일에 비유한다. 수박, 포도, 오렌지 그리고 화성탐사. 도대체 어떤 활동을 했길래, 저런 비유가 가능한 걸까.
수박과 포도 같은 학생운동 시절
 나영에게 고등학교시절은 수박과 같다. “완전 단단하게 둘러싸여 있던 내가 알고 있던 껍질이 깨진 시기에요.” 그는 그 안의 빨간 세상을 알게 된다. 나영은 안국동에 위치한 풍문여고 출신이다. 이 학교는 전교조 교사들과 학생들이 학교 민주화를 위해 치열히 투쟁한 학교로도 유명했다. 나영이 입학했던 94년 당시에는 교사들과 학생들의 투쟁으로 직선제 학생회를 만든 지 6년째가 되었다. 당시 학생회 선배들은 사회문제에 관심도 많아 학생들끼리 외부 집회도 많이 다녔다고 한다. 나영이 재학하던 당시에는 규모가 매우 작았지만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지하서클도 여전히 존재했다. 그는 이런 학교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세상에 눈 뜨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들어간 대학은 재단 비리로 시끄러웠다. 97학번인 그는 대학시절 내내 학생회 활동을 하며 학내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다. 그때 그가 속해있던 학생운동 조직은 차이와 연대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포도 한 송이에 여러 알갱이들이 어우러져 달려 있듯, 다양한 운동 영역들이 만나고 연대하는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학생운동 시기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대학시절을 떠올리면 포도가 생각난다. 한편으로는 학교의 재단 문제가 대학생활 내내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학교가 워낙 문제가 많았어요. 제가 97학번인데 1학년 때 임기 문제가 있어서 재단 이사진과 이사장들을 다 몰아냈어요. 그래서 이사장이 해임됐어요. 하지만 이사장이 이걸 불복해서 소송을 걸었어요. 소송에서 법은 이 해임이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고 이사장의 손을 들어 줬어요. 이사장은 다시 학교로 복귀했어요. 그러면서 구 재단 측이 2000년부터 자신들을 고발한 교수들한테 소송을 걸기 시작했고, 이와 관련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비대위 활동을 하다가, 학생회에 나가 총학생회장이 되서 1년간 투쟁했어요.”
 그렇게 총학생회장이 되어 투쟁하는 동안 재단 측의 고소와 집회시위법 위반 등으로 결국은 수배 상태가 되어 집에도 가지 못했다. 삭발, 단식 등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싸웠다. 나영만 투쟁에 매진한 게 아니었다. 그의 동료와 선배들도 함께했다. 쉽게 그만둘 수 없었다. 학내 투쟁은 극도의 긴장을 요구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 사이 집에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 투쟁 후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안팎으로 1년간 시달린 결과 나영은 공황장애를 얻었다. 긴장상태에 온갖 일들을 겪으면서 몸과 정신이 쇠약해졌다. 그는 여전히 투쟁 이후 얻은 건강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활동가로서 삶을 이어나간다.
톡톡 튀는 오렌지 알갱이 같던 문화연대 
 문화연대는 나영에게 “청춘의 열정이 담겼던 단체”다. 대학졸업 후 2003년경 문화교육위원회가 만들어질 무렵 문화연대에 들어왔다. 그 후 2010년까지, 약 7년 동안 문화연대 활동가로 살았다. 그는 이곳에서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운동 방식에 대해 배웠다. 문화연대를 떠올리면, 그는 톡톡 터지는 오렌지가 생각난다. 당시 그가 함께 활동하던 시기의 문화연대는 기존의 사고를 비트는 사회운동을 했다.
 “처음 문화연대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정부에 정책을 제안한다거나 하는 활동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학생 운동을 하면서 겪은 일들로 세상을 다 알아버렸다고 생각했죠. 건방지게도. 그래서 나가서 무조건 싸워야지, 막 이렇게 생각했어요(웃음). 하지만 문화연대에서 활동하면서 의미 있는 정책들을 제안하고 예산을 감시하는 등의 활동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어요. 또한, 내가 이전에는 잘 생각하지 않았던 의제나 사안들에 대해서도 문화연대의 입장과 활동에서 배운 게 많아요. 예를 들면, 성매매특별법에 관한 입장이라든가, 문신, 대마 합법화 등의 의제에서 기존의 시각과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보게 된 활동들이 많았어요. 그전까지 제가 보수적이었구나를 많이 깨달았어요. 무엇보다 사람들을 네트워킹 하는 일을 문화연대에서 배웠고, 이후 다른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문화연대에 다닐 때 인생의 변곡점이 왔다. 병가 후 복귀를 앞두고 호주로 훌쩍 떠난 일이다. 의사로부터 ‘이대로 살다가는 언제 객사해도 이상하지 않다’라는 진단을 듣고 결국 병가를 내고 치료 중이었다.
 “지금까지도 문화연대 활동가들에게는 부채감이 남아있는 사건이에요. 제가 병가를 내고 치료 중이었는데 직구뜸으로 하루에 세 번씩 맨살을 태우고 마늘과 죽염을 먹으며 극도로 식단 조절을 하면서 운동을 해야 하는 힘든 과정이었어요. 그런데 3개월 만에 한의사가 예상보다 회복 속도가 빠르다며 내 사례를 논문으로 쓰겠다느니 호들갑을 떨어서 예정보다 일찍 복귀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복귀 준비를 하다가 한 달 후에 확인 차 다시 진료를 받으러 갔더니 봄에 다시 처음부터 치료를 한 번 더 해야겠다고 하더라구요. 당시 여러 가지 압박감으로 힘들어도 참으면서 빨리 회복할 생각뿐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동안 참아온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사라지고 싶은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굉장히 충동적으로 이틀 만에 아무 준비도 없이, 누구에게도 연락도 안한 채 호주로 간 거죠.”
 학생운동 시기 때부터 이어져 온 긴장, 벗어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책임감에 짓눌려 살았던 그였다. 가끔 자살충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상황으로 부터 떨어져 2개월간 호주에 살면서 그는 스스로를 돌보는 힘을 갖게 된다. 이때의 경험은 지치고 힘들 때면 그에게 힘을 주는 소중한 경험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은 현재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가다. 뭐랄까. 이 단체는 과일에 비유하기는 어렵다. 단체 일은 화성탐사하는 듯하다. 아직 그 맛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영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한지대다. 이 단체는 페미니즘에 기반한 적녹보라의 패러다임을 지향한다. 단체를 구성하는 해외 각 지역의 단체 활동가들은 페미니스트고, 그런 활동을 오랫동안 지속해 온 이들이 주축이 되어있다. 나영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 차원에서 네트워크하며 그들의 지향을 연결하고 공동의 의제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한다. 그는 2010년부터 이 단체 활동을 시작해 벌써 5년째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는 글로벌+로컬 합성어에요. 이제 세계가 서로에게 동시대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동시에 전 지구적 문제들이 지역적 상황에 따라서는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단지 사안에 따른 연대가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체제와 시스템을 함께 파악하고 대응하는 동시에, 지역적인 주체성과 맥락을 함께 보며 행동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단체에요. 2009년 한국의 제안으로 중국,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활동가들이 모여 만들어졌는데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에서는 각 지역의 활동 주체들을 Glocal Point (GP)라고 부릅니다. 말하자면 저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한국 GP의 활동가인거죠.”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한국GP는 2009년부터 페미니즘 학교를 시작해서 올해 6기째 운영 중이다. 액티비즘(운동이론+각 지역의 운동 현황 및 이슈 등)과 언어 액티비즘(영어+스페인어), 두 과정으로 구성된 학교다. 운동이론과 언어를 각 지역의 상황과 연결시켜 배우며, 여러 영역에서 활동해 온 활동가들이 모여서 함께 새로운 전망을 찾을 수 있는 과정을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학교의 중요한 목표이다. 그리고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중국 GP에서도 7, 8 월을 이용해 3년째 활동가들이 만나는 페미니즘학교를 진행하고 있고, 멕시코 GP에서는 가사노동자 단체, 원주민 여성 단체, LBGT/퀴어 운동과 십대 섹슈얼리티, 재생산 정의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 활동가들이 함께 새로운 형태의 페미니즘학교를 시작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지구지역적 행동을 위한 시도는 아직 많은 어려움 속에 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지역별로 사회 문제나 액티비즘의 상황, 인식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일례로 ‘여성살해’를 주제로 공동행동을 추진했을 때 여성살해는 전 세계적인 가부장체제의 구조 속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중국,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의 구체적인 맥락은 다르다. 중국은 엄격한 산아제한 정책 속에서 여아살해, 즉 또는 여아 감별 낙태가 중요한 문제인 반면, 멕시코는 미국 국경의 공장지대로 이주하여 노동하는 여성들에 대한 대규모의 납치, 살해와 이에 대한 정부, 공권력의 침묵과 비리를 큰 문제로 들 수 있다. 한국은 여성살해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 개념화하거나 맥락화해서 부르지 않는다. 이렇게 각 지역별로 맥락이 달라 성명서를 하나 쓰는 데에도 많은 소통이 필요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맥락들을 드러내면서도 구조적 문제에 대한 공동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앞으로 지구지역적 행동을 위해 제대로 만들어가고 싶은 방향이기도 하다.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하는 사람
 누군가 그랬다. 활동가는 쌍년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나영도 이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막무가내 쌍년이 되는 건 경계한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 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며 성과에 집착하는 이들. 이런 사람들이 그의 활동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반면교사다.
 그는 이런 사람이 좋다. “잘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좋아요. 자기 관심 영역이 있잖아요. 그걸 꾸준히 하는 사람이 좋아요. 보통은 이런 저런 상황이 생기면 막 흔들리고, 이게 대세다 싶으면 막 왔다갔다 그러는데 이런 상황에 굴하지 않고, 자기가 영역을 꾸준히 파며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요. 또한, 남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거나 말하지 않는 사람이요.”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다. 활동가로 산 시간의 깊이만큼 고민의 농도는 짙어간다.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물음을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전에 저는 주로 사안에 따라 현장을 다니며 활동을 해 왔는데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을 하면서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들, 장기적 전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요. 예를 들면,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이 벌어질 때 이전의 저는 무조건 현장에 나가 투쟁하는 활동을 했어요.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의 생각은, 그래서 이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의미하는 게 뭐지? 왜 정규직화 구호를 걸고 이 시스템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하게 되는 거지? 이런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되더라구요. 반면에 현장은 항상 시급해서 장기적이거나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죠. 또, 각각의 운동이 자기 영역에 갇히기가 쉬워요. 사안에 따라 연대를 한다 해도 서로의 문제의식을 소통하고 함께 서로 연결되는 전망을 만들어 내기가 어렵죠. 한 동안은 안절부절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당장의 시급함에 불안해하기 보다는 현장에 함께해 온 여러 사람들과 차분히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 가보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지구지역 행동네트워크 사이트(www.glocalactivism.org)에 들어가 보길. 나영을 더 알고 싶다면. 그의 고민과 활동들을 면밀하게 볼 수 있다. 관심과 격려 그리고 후원은 나영이라는 활동가의 삶을 더 농염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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