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폭력이라는 이름의 문화예술

2017년 5월 22일culturalaction

용산참사, 폭력이라는 이름의 문화예술

신유아 / 문화연대

 

2009년 1월 공권력의 폭력

폭력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행동에 제약을 받는 경우 저항한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많은 사람들은 공포와 분노와 서러움에 저항을 한다. 비명을 지르고 또는 인화물질의 연소로 인한 이산화탄소의 과다분비로 산소를 갈망하며 밖으로 뛰쳐나오기도 한다. 곤봉과 방패의 무력적 폭력에 몸을 가눌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질질 끌려 나오기도 하고, 소화기 호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 폭탄의 추위와 싸우다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공포를 이기는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불이 났다. 공권력은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며 토끼 몰이하듯 철거민들에게 공포감을 주었고, 철거민들은 살기 위해 공권력이 말하는 ‘불법 폭력’으로 저항했다. ‘불법 폭력’은 때리는 것을 막는 행위였고, 화마를 피해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이었고, 망루 한쪽 귀퉁이에서 물대포로 쓰러져가는 망루를 지키는 일이었다. 동료들의 비명에 함께 소리치는 일이었고, 숨을 쉬기 위해 망루 한쪽에 뚫어 놓은 창문을 통해 얼굴을 내미는 일이었고, 치고 올라오는 전투경찰들을 보며 망루를 지키는 몸부림이었다. 이것이 공권력이 말하는 불법 폭력이었고, 그 폭력으로 인해 철거민들은 죽음에 이르렀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구속 수감되었다.

파란망루가 붉은빛으로 몸부림치다가 검게 그을린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그 앙상함을 드러냈을 때, 모두는 경악했고 분노했고 울부짖었다. 거리에는 온통 검은 제복의 경찰들이 깔려있었고, 온통 검은 재들이 흩어져 있었고, 온통 검은 마음들이 허탈하게 망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저항은 폭력이었다. 저항은 죽음이었다. 저항은 절대 하면 안 되는 정권과 공권력의 강요였다.

정권과 공권력이 말하는 폭력은 이후로 1년 동안 용산참사 현장 주변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철거예정 건물에 펜스가 쳐지면 그곳에 그림을 그렸고,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지나간 자리에는 화단을 만들고 낙서를 했으며, 명도가 넘어가기도 전에 건물을 망치로 두드리는 용역들과 농성장 천막을 뜯어내는 경찰들에게는 맨몸으로 맞섰다. 남일당 건물(용산참사가 발생한 건물)과 레아(용산참사로 돌아가신 고 이상림 열사가 운영하던 가게이름), 그리고 삼호복집 등 철거민들의 저항 공간에서 수없이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폭력을 행사했다.

폭력으로 저항하기

2009년 1월 21일 문화연대는 용산참사 문화예술계대책모임을 구성했다. 그리고 전국에 있는 문화예술단체와 예술인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냈다. 대책회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문화행동을 준비했다. 용산참사 현장은 전국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상황실을 만들었고 난 상황실에 결합했다.

참사가 일어난 20일 새벽 TV 속 자막은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용산. 철거민 5명 사망” 믿기 힘든 일이었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용산으로 가고 있었다. 참사현장에 도착과 동시에 급하게 기자회견과 저녁 추모제 등을 준비해야했고 문화연대 활동가로 있던 난 추모제를 준비하게 되었다. 추모공연 팀을 섭외하고, 음향과 무대 팀도 섭외하고, 발언이나 영상 등도 준비했다. 빠르게 준비된 추모제는 이후 1년여간 용산참사 현장에서 내 역할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당시 전미영 서울민족미술인협회 대표는 미술인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참사 당일 이윤엽 판화가는 전미영의 전화를 받고 이미지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당일에 나온 이미지가 바로 <여기 사람이 있다> 판화작품이다. 이 작품은 용산참사 현장을 급하게 보여주던 뉴스에서 지나가듯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생각난 이미지를 표현했다고 한다. 남일당 옥상 위 망루에서 외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화마에 휩싸인 망루를 안타깝게 바라만 보고 있던 시민들의 소리 같기도 했던, 여기 사람이 있다. 살려내라,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이었다.

그렇게 모이기 시작한 미술인들은 매주 용산참사 현장에 모여 다양한 작업을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상황실과 소통이 필요했다. 경찰과 용역들의 견제가 심했기 때문에 현장은 늘 긴장상태였다. 10여 명의 미술인들이 대형 걸개를 그리는 도중에 경찰들이 달려들어 그림을 떼어 가기도 했고, 참사현장 주변을 경찰차로 빙 둘러 쌓고는 누구도 출입 못 하게 하기도 했다. 화마로 잿더미가 된 철거현장에서 미술가들은 작품으로 투쟁을 만들어 갔다. 버려진 이불, 타고 남은 매트리스, 부서진 나무 조각, 치열했던 참사 당일 부서져 방치된 경찰차등 보이는 것들마다 화폭이 되어 아픔과 분노를 담은 이미지들이 그려졌다.

작가들과 소통을 맡은 나는 자연스럽게 미술인들 틈에 끼어 작업을 하기도 했고, 현장의 상황을 공유하기도 했고, 미술인들의 작품을 온라인으로 내보내며 용산 참사현장의 연대를 호소하기도 하고, 추모제를 위한 걸개그림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티셔츠를 만들어 현장후원금을 만들기도 했다. 2005년 평택 대추리 미군부대 이전반대 주민투쟁 당시 함께 연대했던 미술인들이다 보니 서로 어느 정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우리들은 용산 참사현장에서 대부분 함께하게 되었다. 상징의식은 어떤 것으로 할지, 분향소는 어떤 식으로 만들지, 철거된 빈집을 점거하여 공간을 만들어 내는 일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미술인들과의 작업은 고통 속에서도 위안이 되었고, 진상규명 없이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1년여 기간 동안 나를 버티게 해준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현장작업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평화박물관에서 기획전시 <망루전>이 열렸고, 이 전시 이후 <망루전>은 이후 전국에 있는 전시공간으로 옮겨져 전시 활동으로 이어졌다. 지역 미술제에서 전시요청이 오기도 했고, 지역주민들의 요청으로 전시하기도 했다. <망루전>이 용산 참사현장에서 만들어진 작품의 전시라면, <끝나지 않는 전시>는 개별 작가들이 자신의 공간에서 만든 작품을 용산 참사현장으로 가져와 시민과 소통하는 방식의 또 다른 전시의 제목이다.

고 이상림 씨가 운영하던 가게의 이름은 ‘레아’였다. 이 가게가 있던 건물은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 바로 뒤에 위치했다. 용산 범대위 상황실은 이 건물 2층에 있었다. 상황실과의 협의 하에 파견미술팀은 이 건물을 전시공간으로 만들기로 했고, 전시 공간 앞은 매일 추모제를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전미영, 이윤엽 등 미술인들에게 레아 1층 운영에 대한 고민을 전달했고, 바로 레아 1층을 전시장으로 만드는 일을 했다. 전시는 1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작가의 작품을 설치했다. <끝나지 않는 전시>의 전체 기획은 전미영이 맡았다. <망루전>과 <끝나지 않는 전시>는 용산 참사현장으로 올 수 없었던 사람들과 용산 참사현장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상호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저들이 말하는 폭력은 수없이 많이 이루어졌고 저들이 말하는 폭력은 끝나지 않는 힘의 원천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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