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로운 덕후의 우울]인연(45호)

2014년 7월 15일culturalaction

인  연

최지용

(hohobangguy@hanmail.net)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 말을 ‘인간관계가 맺어지고 끊어지는 데에는 어떤 숙명 같은 것이 있다.’는 뜻으로 쓴다. 그리고 ‘맺다’, ‘끊다’ 같은 서술어와 함께 ‘인연을 맺다.’, ‘인연을 끊다.’와 같은 형태로 사용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용법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연’이 숙명적이고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일개 인간이 ‘인연’을 ‘맺’거나 ‘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쩌다 보니 인연 안으로 들어와진 것이고 또 어쩌다보니 인연 밖으로 나가진 것 아닌가.
사실 인연이라는 말부터가 조금 이상하다. 인연이라는 말이 불교에서 나왔으니 불교식으로 생각해보자면, 원래 모든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모두가 모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 원래 서로 연결되어있는데, 딱히 인연이라는 게 또 연결되고 끊어질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인연을 맺는다.’고 말하는 상태는 엄밀히 말하면 원래 연결되어 있던 관계가 밖으로 드러나 확인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고,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 있던 관계가 안으로 숨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연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을지언정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동양적 사유의 중요한 명제,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이치’라고 부른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믐이 되어 달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달이 그 자리에 없는 것이 아니듯이. 지금 그가 당신 앞에 있지 않는다고 하여도 당신이 그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와 당신은 끊임없이 계속 이어져 있다.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확실히 숙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만나서 연을 맺고 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은 모든 우연적인 요소들이 합쳐져서 필연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관계가 가볍든 무겁든 간에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며, 숨겨져 있던 것이 눈앞에 드러나 우리로 하여금 그 관계를 인식하게 해준다. 하지만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조금 다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한 번 맺어진 인연은 절대 인간의 힘으로 끊을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보통 천재지변이나 전쟁과 같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서였다. 물론 옛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전반적으로 이랬다는 것이지 인력으로 연을 끊는 일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반면 현대의 사람들은 인연을 끊는 것에 훨씬 자유로운데, 서구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해간다는 실존주의와 여성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드러내기를 시도하는 여성주의가 대두하면서 자유연애라는 개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체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근대화 (또는 현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중요한 전통적 윤리를 잃어버린 것은 아쉽다. 서구는 기독교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기독교에서 가장 으뜸으로 생각하는 가치가 ‘사랑’이다.(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리고 근대로 넘어오면서 ‘신’보다는 ‘인간’의 삶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적인 사랑’의 자리가 ‘낭만적인 사랑’으로 치환되었다. 하지만 ‘낭만적인 사랑’이란 허구에 가깝고, 관계라는 것은 아름다운 시간보다 지난한 시간을 함께 할 때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동양에서는 기독교 문화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동양에는 인격을 가진 유일신이 없다. ‘도’나 ‘태극’ 같은 우주의 이치는 만물 위에 존재하는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들 간의 ‘관계’, 만물들 간의 상호작용 또는 그 생태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꼭 무언가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야한다면, 우리 모두가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내는 에너지 그 자체가 ‘신’인 것이다.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관계’에 주목해 왔다. ‘나 또는 너’가 아니라 ‘나와 너’이다. 주체와 객체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동양에는 원래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다. 흔히 우리가 지금 사랑이라고 해석하는 ‘애(愛)’, ‘련(戀)’ 같은 단어들은 ‘그리워하다’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애인에게 “사랑해”하고 하는 말은 옛날에는 없었던 것이다. ‘하다’는 행위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므로 ‘사랑 하다’는 상태가 있다면 그 부정형인 ‘사랑하지 않다’도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상태는 언제든 ‘사랑하지 않는’ 상태로 변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란 싫을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지만, 싫을 때나 좋을 때도 서로 이어져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싫은 순간도 함께 살고 좋은 순간도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인연’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이 말은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이 만나는 데에는 우주적 차원에서 정말 많은 요인들이 작용하여야만 가능하므로, 그 만남을 소중히 하라는 의미이다. 우연의 고리들이 이어져 만들어지는 필연.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의 결과이다. 어쨌거나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꼭 잡고 놓지 말기를 바란다. 설령 지금 붙잡을 손이 없더라도, 언젠가는 소중한 사람을 꼭 만나게 될지니.
결국은 소중한 사람의 손을 찾아 그 손을 꼭 잡고 있기 위해서, 오직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싱겁게 흘러가는 시간을 그럭저럭 살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요?
           -<연애소설>, 가네세로 가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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