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재난이 되어버린 공영방송, 무엇이 달라져야 하나(41호)

2014년 6월 19일culturalaction
[편집자주]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 참사, 대한민국 언론에게 묻다
세월호가 침몰한 4월 16일 이후 언론들은 세월호 침몰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언론보도의 현실과 언론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어떤 언론은 세월호 침몰 당일부터 보험금과 배상의 문제를 보도하기 시작했고, 어떤 언론은 현장의 당사자들에게 무리하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리고 몇몇 보수적인 언론들은 세모그룹의 유병헌 일가를 잡으면 세월호 참사의 문제들이 해결될 것처럼 앞다투어 유병헌 추적극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또한 공영방송인 KBS는 권력의 눈치를 보며 세월호와 관련해 왜곡된 보도를 내보냈고 이에 항의한 노조원들을 탄압했다. 물론 이런 언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진도항과 안산 그리고 서울의 현장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언론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언론은 지금 어디쯤에 머물고 있는 걸까? 우리는 언론의 공공성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대안적 언론은 가능할 것인가? 많은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문화빵>의 특집은 ‘대한민국 언론의 현재와 미래’를 묻고자 한다.
① 포스트 세월호 시대, 좌파는 미디어공공성 문제에 집결하라 / 전규찬(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
② 재난이 되어버린 공영방송, 무엇이 달라져야 하나 / 홍성일(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③ 한국사회 대안언론을 말하다 / <문화빵> 편집위원회

재난이 되어버린 공영방송, 무엇이 달라져야 하나

 

 

 

홍성일(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세월호 참사의 충격 여파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환부가 깊을 뿐만 아니라 신체 곳곳에 넓게 퍼져 있기 때문이리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무력감이 사회 전체를 휩쓸고 있다. 대한민국 전체가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꿈틀대는 월드컵의 열기조차 상처를 감추려는 조증처럼 보인다. 
 
관련하여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타이타닉 호의 침몰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세월호 참사에 적용하고 싶다. 그는 타이타닉 호의 침몰이 서구에 극심한 충격을 안긴 것은 비단 사고의 규모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한 시대의 종언을 극적으로 고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912년 4월 15일의 비극은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의 직전에 일어난 참사였다. 두 세계 대전은 인류의 진보에 대한 자신감을 인류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묵시론으로 바꾸었다. 타이타닉 호는 다가올 재난이 수면 위에 떠오르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린 거품이었다. 타이타닉 호에 응집된 진보와 발전의 가치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사상누각이었고 이는 이후의 두 세계대전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마찬가지로,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맹렬하게 거부하고 있었던 사회적 진실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한류가 세계를 누비며, 많은 이들이 한국 여행을 선망하고, 세계적으로도 무시 못 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실은 시스템 부재와 임기응변, 부패와 각자도생으로 급조된 외화내빈의 빈 껍데기였음이 드러났다. 이윤의 욕망 앞에 생명은 경시되었고 사고 이후 뒤늦은 책임 떠넘기기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적폐를 방치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더 큰 불행으로 점철될 것이라는 전망이 폭넓게 확산되었다. 
 
특히 언론은 세월호 참사 국면 속에서 자신의 무능한 민낯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사고 직후 전해졌던 전원구조 오보는 거대한 언론 재난의 시작이었다. 유가족을 고려하지 못했던 현장 대응, 비판과 검증 없는 정부 발표 받아쓰기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쓰기, 정치권 눈치 보기와 팩트 마사지, 현장과 괴리된 뉴스 생산은 두고두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사회적 알람인 언론이 뒤늦게 비분강개하여 한국 사회 전체의 무능과 무책임을 질타하는 모습에서 진정성을 찾기는 어렵다. 언론은 이번 참사를 겪으며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조롱을 감내해야 할 정도로 공공의 적이 되었다. 특히 공영방송의 무능은 참담했다. 어버이날, 세월호 유가족이 참사 관련 KBS의 보도 무능에 항의하여 자식의 영정을 들고 KBS에 항의 방문한 것은 국가재난주관방송사 KBS의 무너진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KBS에서는 청와대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보도 통제를 지시했고 KBS의 인사에 개입했다는 정황이 발견되어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길환영 KBS 사장의 불명예 퇴진은 일시적으로 KBS의 무능을 감춘 진통제가 되었다. 
 
그나마 이는 MBC에 비교하면 조금은 나은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MBC 또한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에서 무능했음에도, 그리고 아예 5월 7일 <뉴스 데스크>에서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슬픔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애국심이 부족한 조급증 환자로 질타하여 슬픔에 빠진 대다수 국민적 정서와는 배치되는 보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로부터 아예 무시된 채 사회적 관심의 바깥에 서 있다. 이 와중에 MBC의 안광한 사장은 채 사고가 수습되기도 전인 4월 26일 사내 메일을 통해 “특보방송은 MBC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고, 모두들 힘든 가운데서도 온몸을 던져서 제 역할들을 해준 덕분에 우리 뉴스가 다시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라는 상황 인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내부로부터 나온 자성의 비판에도 꿈적 않고 오히려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여 그를 징계하였다. 지금 MBC에서 세월호는 기의 없는 기표이다. 의미를 상실한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오직 월드컵 장사에만 열심이다.  
 
이처럼 언론이 적폐가 된 상황 속에서 세월호 참사는 앞으로 언론이, 그중에서도 특히 공영방송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긴급한 시대적 화두를 던져 주었다. 타이타닉 호의 침몰이 두 세계 대전의 전조였다면 세월호 참사는 다가올 한국 사회의 비극을 알리는 전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물질만능주의, 시스템의 부재와 부패, 시효를 상실한 구습으로부터 단절해야만 이후의 대참사를 막을 수 있다. 언론, 그리고 공영방송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언론이 세월호를 가라앉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론이 각종 규제 철폐와 관련 부처의 부패에 경고음을 울리지 않았기에 세월호 참사는 방조되었다. 그들은 일반 시민들의 공통된 삶을 방기하였다. 사고 이후에도 언론은 제대로 된 보도를 못하고 오히려 사고 수습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은 자신의 몸속에 뿌리 깊게 박혀버린 물질만능주의, 시스템의 부재와 부패, 구습을 냉정히 직시해야할 것이다. 
 
관련하여 흥미로운 통계 자료가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수용자의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한때 한국의 언론 중 가장 신뢰를 받는 매체는 신문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신문의 신뢰도는 급전직하한다. 언론사들이 생존에 내몰리고 극심한 경쟁이 이루어지며 신문은 뉴스가치를 상품가치로 바꾸었고 이 와중에 매체 신뢰도가 추락하였다. 한편 1998년을 기점으로 텔레비전은 가장 신뢰받는 언론매체로 부상했다. 상대적으로 공영방송에 의하여 과점되었던 방송 매체는 경쟁의 논리 바깥에 있었고 수용자로부터 높은 뉴스 신뢰도를 얻을 수 있었다. 적어도 뉴스는 드라마나 예능과 같은 강한 시청률 경쟁에 내몰리지 않았다. 그러나 2011년을 기점으로 방송 환경은 달라졌다. 한꺼번에 네 개의 뉴스가 가능한 채널, 즉 종편이 태어났다. 한국의 방송환경은 두 개의 공영방송, 한 개의 지상파 민영방송, 그리고 네 개의 종편과 두 개의 보도전문채널이 경쟁하는 상황으로 탈바꿈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텔레비전 뉴스도 신문과 같은 상황을 겪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뉴스 가치의 상품 가치화 말이다. 세월호 참사 초기에 숱한 자극적 보도가 쏟아진 이유이다. 공영방송은 주도권을 상실했다. 이를 타개하지 않고서는 언론의 적폐를 일소할 수가 없다. 
 
둘째로, 보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저해하는 시스템,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부패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KBS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란은 공영방송의 뉴스가 시청자에게 향해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에게 향해 있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두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방송사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 앵커였고 당일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해당 프로그램의 기획회의에 참여했던 이가 그 날 오후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령되는 상황 속에서 기자는 시청자가 아니라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게 당연하다. 지난 2012년의 대선에서도 이와 같은 공영방송의 권력과의 유착 문제가 주요한 논쟁점으로 부상했으며 박근혜 대통령 역시도 후보시절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은 채 책상 서랍 어딘 가에 방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론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공영방송이 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청자와 직접 대면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진지하고도 시급하게 논의해야 한다. 기존의 시스템에 기생하여 부패한 나쁜 기자의 싹을 자르는 일 역시 필요하다. 사장 퇴임 후의 권력 공백 속에서 총리후보 문창극에 대한 KBS의 날 선 검증이 반가웠던 이유이다. 
 
끝으로 출입처에 의존하는 현재의 뉴스 취재 관습을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한국의 언론은 발로 뛰는 현장을 중시하기보다는 책상에 앉아 배부 받는 출입처의 보도 자료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출입처의 우선순위를 뉴스가치의 우선순의로 혼동하는 구습이 형성되었다. 출입처의 권한과 책임이 막강할수록 해당 출입처의 보도 자료는 높은 뉴스 가치를 부여받는 것으로 오판되었다. 이 와중에 현장의 고민, 현장의 살아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뉴스 속에서 사라졌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양산된 숱한 오보는 출입처가 잘못된 자료를 제공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기자들이 현장을 간과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와 같은 관행은 비단 세월호 참사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2011년의 구제역 파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와중에도, 통계상의 물가와 체감 물가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피의자의 항변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입처의 보도 자료는 기자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뉴스원으로 각광받았다. 출입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발로 뛰는 기자를 우대할 수 있는 새로운 뉴스 생산 관행이 기자 조직 내부에서 고민되어야 한다. 권력자의 눈치가 아니라 현장의 실력으로 기자조직 내부가 단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언론, 그리고 공영방송이 스스로를 자정할 수 있을까? 정치권이 챙겨가고, 조직 라인이 승진시키며, 좋은 뉴스의 척도가 시청률이 되는 상황에서, 시청자와 독자를 대표하는 좋은 기자는 과연 어떤 보상과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진짜 숙제는 좋은 뉴스를 좋다고 말하고 나쁜 뉴스를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성숙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 전반에 스며든 적폐를 드러낸 위기의 신호였다.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의 사이렌이 사회의 거짓 평온을 발가벗겼다. 
 
*이 글은 한국방송작가협회가 발간하는 월간 <방송작가> 6월호에 실린 내용을 일부 수정하고 보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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