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무대연구소 일지]1947년, 교향악단과 청중은 어떠해야 했는가? (20호)

2013년 6월 18일culturalaction

[이런저런무대연구소 일지] 20호

 

1947년, 교향악단과 청중은 어떠해야 했는가? 

 

송현민 (이런저런무대연구소 소장, 음악평론가)

 

클래식, 이 땅에 들어 온지 100년이 넘었다. 이유선의 <한국양악백년사(韓國洋樂百年史)>(1985, 음악춘추사), 이강숙·김춘미·민경찬의 <우리 양악 100년>(2001, 현암사) 등의 저서의 제목만으로도 양악, 즉 이 땅에 유입되어 ‘작동’한 클래식의 나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요새 한국 근현대음악사를 재밌게 읽고 있다. 특히 이 땅에서 ‘작동’한 클래식-음악과 함께 한 평론의 역사를 눈 여겨 보고 있다. 사실 음악평론이 이 땅의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적다. 대부분 기악, 성악, 작곡의 역사뿐이다. 노스럽 프라이의 표현을 빌린다면 평론이나 비평은 “기존의 예술에 얹혀사는 예술, 창조적인 힘의 이차적인 모방”으로 취급 당하거나, “비평가들이란 예술에 취미는 있지만 예술을 낳을 힘도 보호·장려할 돈도 없는 지식인”으로 오해 받는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사 속의 평론가들은 쓰고 또 썼다. 어느 시대나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안고 있고, 어느 시대나 과도기라고 생각하는 법. 이런 시대에 자신의 평문이 음악계를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그나마 덜 불행하게, 심폐소생술을 해준다기보다는 질식사의 속도를 늦춘다는 믿음으로 쓰고 또 쓴 것이다.

그런 글 중에 하나를 뽑아 소개한다. 음악평론가 박용구(1914~)가 쓴 「교향악단과 청중」의 전문(全文)이다. 이 땅의 역사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를 ‘해방공간’이라 부른다. 좌와 우로 가르기 바빴던 시대였다. 밥이 부족해 굶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교향악단이 운영되었다는 사실에 인간과 예술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봤다. 그런 음악과 부대하는 비평이 있었다는 사실에 이 땅에 가늘게 서 있는 음악평론의 존재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박용구의 비평은 ‘예술지상주의의 위태로운 샛길(間道)’을 걷으려는 교향악단을 향해 ‘인민대중’을 챙기라고 한다. 글의 내용은 작성·게재된 날짜만 신경 쓰지 않는다면 지금의 음악계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글은 <서울신문>1947년 3월 25일자에 게재되었다.

 

 

교향악단과 청중

 

축음기 앞에서 눈을 허공에 던지거나 눈을 슬며시 감고 ‘통조림’ 음악만 들어오던 우리들에게 고려교향악단의 연주는 해방이 가져오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바이스만은 <음악의 신성탈화(神性脫化)>에서 기계음악 만능시대를 예견했지만 기계음악의 발달은 결코 실연(實演)되는 음악을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음악을 보급시키는데 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의 보급화에 생명을 부어넣는 것은 역시 훌륭한 음악의 실연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레코드 음악과는 비할 수도 없을 만큼 어린데오 불구하고 좁은 방에서만 감상할줄 알던 호악가(好樂家)들이 연주회장으로 동원되는 것은 실연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려교향악단의 정진을 경하하여 마지않는다. 동시에 나는 레코드나 라디오에 의하여 양적으로 보급되어 가는 음악에 참생명을 불어넣고 음악의 본질을 감수케 하는 책임을 우리나라의 최고 연주단체인 고려교향악단에게 요구하고 싶다.

그것은 오로지 절대적으로 정확하고 엄밀한 합주를 목표로 하는 엄격한 훈련을 쌓아올림으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합리적인 조직에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고려교향악단이 ‘자치제’라는 민주적인 조직으로 개혁되던 전후의 제11, 12회 공연이 보여준 비약적 발전을 본단(本團) 기본형태의 정비에서 힘입은 바 크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의 교향악단은 특수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곳의 교향악단은 세계의 모든 음악 중심에서 멀리 격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모든 것을 악단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독특한 조직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신문에 썼던 나의 “교향악 운동의 기본형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예술적으로 우리나라의 양악이 서구음악의 상품시장에 지나지 않는 아메리카 선교사의 절대적인 영향 밑에 자랐으므로 질적 비약을 감행할 수 없었다는 것과 이식 자본주의의 질곡 밑에서 생성한 조선의 자본가계급이라는 것은 결코 봉건주의의 혁파자로서나 시민문화의 수립 내지 옹호자로서의 진보적 계급이 아니므로 도저히 문화형성의 진보적 역할, 재정적 원호나마도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교향악단이 합리적인 예술행동을 위하여 민주제를 확립하고 이제 또 재정적 자립을 꾀하여 회원제를 통하여 청주의 조직화를 지향하는 의도는 좋다. 그러나 과연 게릴라전적인 회원제로서 청중을 조직화하고 확대화하여 음악의 대중화까지 끌어나갈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소수의 파트론 대신에 다수의 파트론을 가져오는 고식(姑息)적 방법에 그치리라.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인 민주주의혁명의 완수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인민대중의 자각을 공포(恐怖)하여 이것을 억압하려는 반동(反動)하에서는’ 음악과 청중의 강인한 유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교향악단의 ‘자치제’가 다른 문화부면과 횡적 결합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독선적 경향을 내포하고 있듯이, 나는 ‘회원제’에서 예술지상주의의 위태로운 샛길(間道)을 예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와 같은 특수한 환경 아래 놓여있는 고려교향악단이 진실로 줄기차게 뻗어 나가려면 성장하는 인민대중과 같은 운명 가운데서 성장해야 할지니 “비록 보좌(寶座)가 굴러들지라도 진리를 지키고 진리에 죽으라”고 부르짖는 베토벤의 휴머니즘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길도 여기에 있다. 동 악단이 베토벤의 120년제를 기념하여 공연을 가짐은 엄숙한 자기비판을 통하여 베토벤적 정신을 옳게 계승하는 데에서만 가장 깊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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