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금상의 다문화사회 읽기]해외파견 이주민, 파독 광부와 간호사(18호)

2013년 5월 23일culturalaction

해외파견 이주민, 파독 광부와 간호사

권금상/ 사람숲다문화사회연구소 대표

(인터넷신문 ‘우리아이뉴스’ 편집장)

올해는 한국과 독일 수교 130년을 맞는다. 아울러 광부와 간호사 노동인력 집단을 독일로 파견한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독일은 패전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해 중공업정책을 실시하였는데, 60년대 들어 경제가 활성화되고 복지정책이 실시된 당시 국가적인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에 반해 한국은 총체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일제 점령기의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재생산 토대의 전반적인 취약함과 탈근대화의 몸부림 속에서 총체적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한국은 외화벌이가 필요했다. 당시 독일의 노동인력 충당 요구와 한국의 송출을 통한 외화벌이라는 상호간의 필요가 잘 맞았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2,700달러, 외국인들이 돈벌이를 하러 국내로 유입되는 다문화사회, 외국인 주민 150만 시대를 사는 현재의 한국위상으로서는 쉽게 와 닿지 않는 모습이지만 당시 한국은 절대적인 빈곤국가였다. 1960년 초 남한의 인구는 2400만 여명, 국민소득은 78달러에다 극심한 실업과 가난으로 하루 먹거리조차 해결하는 것이 힘든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 8월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서독파견 광부 모집 공고를 실시하였는데 19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가 7968명이었고 응시 경쟁률은 15: 1이었다. 이어 파독 간호사모집도 이어졌다. 1966년에 6500명의 간호사가 모집되었고 1976년까지 1만 천 여명의 간호사가 파견되었다. 당시 광부모집에서 채용 조건이 20-35세 이상의 젊은 남자, 학력은 중학교 이상, 광산경력이라는 요건으로 제시했으나 고학력, 광산경력과 무관한 젊은이들이 대거 지원하였다. 제시된 독일광부의 임금은 평균 160달러로 당시 5급 공무원의 7배가 넘어 경쟁이 치열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글을 읽을 줄 아는 건강하고 젊은 남자들은 다수가 지원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학력을 낮추거나, 광산 경력을 가짜로 만들어서 통과되었다고 한다. 광부와 간호사 모집으로 인해 전국에서 몰려온 지원행렬로 시험을 치루면서 인원을 추려냈다. 합격자들은 서울에서 반공교육 3일, 독어교육 3주를 받았고 국내은행과 3년 동안 번 돈을 송금한다는 적금계약의 의무사항도 들었다. 이것은 외화를 국내로 반입시키기 위한 정부의 조치였고 광부와 간호사로 벌어들인 외화는 산업발전의 도약에 종자돈이 되었다.
 1960년 파독광부 출국(왼) 1966년 파독간호사의 독일입국 광경(오른) 출처:KBS
파독광부들은 주로 독일의 루으르 광산지역에서 힘든 노동을 견뎌야 했다.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탄광생활로 살아서 돌아오라는 인사말 글뤽 아우프(Gluck auk)는 일상의 구호였다. 당시 독일에서 3년 일하면 서울에서 집을 한 채 살 수 있었기에 파독간호사나 광부는 인생역전을 위한 적금이나 다름없었지만 가족들과 헤어져 해외 노동자로 떠나는 이들은 고생을 각오해야 했다.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인 간호사들이 기피하는 야근을 자청하며 돈을 벌어 조국의 부모 형제들 생활비와 학비로 보냈다. 그들은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더 많은 돈을 보내기 위해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잠도 줄여가며 억척스레 일하고 모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1965년부터 10년간 고국에 송금한 외화는 총 1억153만 달러로 총 수출액 대비 1.6∼1.9%(1965∼1967년 경우)에 달한다.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한국으로 송금해 온 외화는 조국의 산업화를 앞당겼다.
3D를 기피하는 한국노동시장에 외국인들이 들어와 있는 현실을 비교하면 높아진 한국의 위상으로 격세지감을 실감하게 된다.
당시에 독일로 건너간 광부·간호사 가운데 40%가 서독에 잔류했고, 40%가 본국 귀국을 택했고 나머지 20%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 제3국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독일 한인은 3만5천 명 정도인데 이 가운데 상당수가 당시 파견된 근로자와 그 가족들이다. 이들이 독일에 남은 이유 중 하나는 노동시장에서 차별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며 특히 간호사들의 경우 숙련된 능력을 인정받아 서독 병원이 계약 연장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잔류 비율이 높았다.
최근 들어 서독에 남았던 40%의 사람들 중에 한국에서 남은 여생을 한국 땅에서 보내고 싶어 돌아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한국으로의 재이주는 정책에 의해 뒷받침되었으며 남해에 위치한 독일마을이라는 곳을 중심으로 2003년부터 입주가 시작되어 현재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또한 충남 당진에서도 2008년부터 독일에 거주하는 이들의 한국행 재이주 신청을 받아 개발을 시작하고 있어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재이주는 공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파독 50년을 맞는 광부와 간호사의 이주와 귀환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이들은 독일로 간 외국인노동자로서 이들의 인내와 노고는 가족과 나라의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우리는 이들의 노고에 감사해 하며 애국자라 부른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독일로 떠난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이유로 한국에 들어와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고 돈을 벌어 가족과 그들 국가에 도움을 주는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은 너무도 이중적이다. 독일 노동시장에서 인종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진술에 비해 우리 땅에서 사는 이주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너무도 차별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문화사회에 살면서도 외국인들에게 사회적 거리감이 팽배한 우리들의 인식은 언제야 열릴 것인가, 우리는 통합의 상상력이 절실한 시기를 살고 있다.
남해의 독일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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