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무대연구소 일지] 성북동비둘기의 ‘열녀춘향’ – 성춘향(成春香)이 아니라 성(性)춘향이라꼬? (15호)

2013년 4월 11일culturalaction

성북동비둘기의 ‘열녀춘향’ 

– 성춘향(成春香)이 아니라 성(性)춘향이라꼬? 

송현민(이런저런무대연구소 소장)

연극 ‘열녀춘향’(3.14~31, 게릴라극장)을 봤다. 김현탁이 연출했고, 9명의 춘향이가 나왔다.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작년에 김현탁이 연출한 ‘메디아 온 미디어’(2012. 12. 22~30,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를 보고 온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 졸라 아까운 공연이야. 조금 더 돈을 들였으면···” 그래서 나도 그 작품을 봤다. 무대는 가난했지만 상상력이 투여한 자본은 메가톤급이었다. 그리스 고전(古典) 속 메디아가 김현탁의 상상력에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던 것. 가학과 피학을 오고가는 가운데 우리가 알고 있는 메디아가 ‘이 메디아’였다가 ‘저 메디아’를 왔다갔다 했다. 그 변화와 짙어지는 광기가 제법 재밌었다. 그 날 밤, 나도 일기장에 뭐라뭐라 적었다. “김현탁, 조금 더, 조금만 더 하면, 말쑥한 김기덕이 되겠다!”라고.
사진 제공 : 극단 성북동비둘기
‘메디아 온 미디어’로 딱 한번 마주했던 김현탁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주인공 가지고 노는 솜씨가 일품이다. 이번에는 춘향이다. 춘향이 잡아 비틀어 꾸욱 짜, 거기서 나온 단물과 핏물로 그는 ‘김현탁표 춘향전’을 다시 썼다. 한 명의 춘향이는 9명의 춘향이로, 한복이 아닌 핫팬츠와 민소매, 그리고 ‘살색’(즉 노출했다는 것!)으로 무장한 몸매 좋고 보기 좋은 춘향이들이다.
사진 제공 : 극단 성북동비둘기
일단 이 춘향이들 골 때린다! 지조와 절개의 대명사 성춘향(成春香)이 아니라 아주 그냥 성(性)적으로 무장한 ‘성(性)춘향’들이다. 첫 번째 춘향이, 핸드백에서 립스틱, 지갑 등을 무대에 쏟고, 들어갔다 나왔다, 펴졌다 접어졌다 하는 모든 것을 성행위에 비유하며 ‘춘화’를 설명한다. 두 번째 춘향이, 미스코리아의 입상 장면을 보여준다. 세 번째 춘향이는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고추요리를 설명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방점이 찍히는 것을 보면 ‘주물러’ ‘흔들어’ ‘집어 넣고’ ‘크고 굵은’ 등등이다.
네 번째의 리듬체조 춘향이와 다섯 번째의 바이올리니스트 춘향이. 리듬체조선수 춘향이는 얼핏 손연재를 떠올리게 한다. 9개의 옴니버스 중에서 순서상 허리에 해당되는 장면에 오니 연출가의 의도가 짙게 묻어나는 듯했다. 사실 손연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는 묘한 것들이 포개져 있다. 아니, 시선 하나에 수많은 의미가 포개져 있어 묘하다. 생각해보면 건전한 스포츠를 소비한다는 핑계로, 국민동생을 응원한다는 의미로 손연재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시선 즉, 체조를 할 때 옷이 들춰지고, ‘가장 야한 것은 옷이 하품을 할 때다’라고 말한 롤랑 바르트의 표현대로 그 ‘하품’하는 옷과 육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겹쳐져 있기도 하다. 그녀의 땀방울과는 다르게 그 국민 요정이 팅커벨 같은 ‘요정’인지, 아니면 저기 어디 강남의 한 구석에서 한복 입고 술 따르는 ‘요정’인지 구분을 흐리게 하는 것은 그녀가 아닌, 이런 시선들이다. 의자에 앉아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하는 춘향이는 어떤가? 춘향이는 의자에 앉아서 신들린 듯 바이올린 선율을 휘날리고 있는데, 그 치마가 제법 짧다. 그런데 그 건너편에서 연주를 하는 남성 주자들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점점 뚜렷해진다. 춘향이는 연주에 빠져 있고, 남성연주자들은 춘향이의 가랑이에 빠져 있다. 이쯤되니 연극 자체가 관객에게 묻는 것 같다. “말해봐. 너 이런 적 있지?”
사진 제공 : 극단 성북동비둘기
만약 “이런 적”이 있다면, 그 농도가 짙을수록 마지막에 춘향이가 먹이는 한 방의 강도는 비례해서 다가온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를 곤장으로 두드려 패는데 김현탁이 준비한 곤장은 ‘사탕’이다. 곤장의 수만큼 춘향이는 알사탕을 입에 넣는다. “셋!”하면 3개를, “다섯!”하면 5개를. 패러디와 풍자의 강도가 세다. 나중에 다 들어간 사탕의 개수는 자그마치 40개는 될 것 같다. 인간으로서의 먹고 말하는 입이 아니라 ‘아가리’가 되어버린 그 ‘구멍’으로 하염없이 사탕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관객으로서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알게 모르게 뒤틀린 남성의 시선과 그로 인한 폭력의 지점을 향하는 클라이맥스다.
누군가는 이 작품이 각 장면마다 춘향이의 색기와 지조, 건강미, 지성미 등을 함축했다고 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내가 생각할 때, 날선 풍자극이었다. 나는 그가 던지는 교훈이 근엄한 척 하지 않아 좋고, 경쾌한 직구라서 좋다. 그러면서도 불편함으로 뭔가 지금 선 자리를 찝찝하게 한 번 돌아보게 한다. 김현탁의 매력은 거기서 나온다. 그가 다음 건드릴 인물은 누가 될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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