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겁박효과라는 검열 – 보이지 않는 공포의 실체를 더듬으며(27호)

2013년 10월 2일culturalaction
[편집자주] <천안함 프로젝트>가 메가박스에서 상영 중단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이 사태는 사전 검열이나 독과점으로 인한 개봉 실패 혹은 조기 종영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상영 중인 영화가 극장에서 스크린을 내린 전대미문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종북 프레임으로 이 영화를 규정하고 검열하려는 일부 사회적 흐름도 문제이긴 하지만, 문화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문화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이지 않을 수 없다.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외쳐야 할 시점에서 또 다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지난 16일에 열렸던 긴급토론회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중단 사태,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이야기했듯 “메가박스가 검열의 대리기구 역할을 했다”는 점을 다시 유념할 필요가 있다. <천안함 프로젝트>는 이런 상황에도 멈추지 않고 관객들을 만나려 하고 있다. 지난 28일엔 관객들의 광장 상영 요청에 의해 지난 청계광장에서 야외 상영회를 가졌었다. 그래서 이번 <문화빵>에서는 여전히 항해중인 이 영화와 이 사태에 대해 다뤄봤다.
① 겁박효과라는 검열 – 보이지 않는 공포의 실체를 더듬으며 / 김영진(명지대학교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②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블랙 코미디, 누군가에겐 공포영화 / 강성률(영화평론가)
③ 문화적 파시즘, 그 동전의 반대면이 되지 않기 위하여 / 최혁규(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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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7호

겁박효과라는 검열 

ㅡ 보이지 않는 공포의 실체를 더듬으며

김영진(명지대학교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백승우 감독의 <천안함 프로젝트>는 얌전하고 신중한 다큐멘터리이다. 잘 만들고 못 만들고를 떠나서 이 영화가 끼칠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신중히 고려해 질문을 던지는 편에 머물러 있기를 택한 영화이다. 이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일어난 일련의 시끄러운 소음효과를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접근법으로 볼 수 있다. 좀 매몰차게 얘기한다면 공중파 텔레비전의 시사 다큐 프로그램에서 방영될 법한 내용과 형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영화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모 방송국의 기자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봤는데 방송의 저널리즘 역할을 방기하는 것을 종사자 입장에서 반성하는 듯하면서 이 다큐멘터리가 국방부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굳이 시도하지 않은 점을 들어 일방적이라고 슬쩍 비판하고 있었다. 물론 동의할 수 없는 비판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국방부 백서를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그에 대한 반론을 인터뷰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정부 당국의 발표와 반론자들의 주장을 형식적으로 충분히 안배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필자의 경우 올해 처음 영화제 프로그래밍 일을 하면서 영화제 출품 의뢰가 들어온 <천안함 프로젝트> 가편집본을 외부인으로서는 처음 보게 되었다. 많이 망설여지는 작품이었는데, 그 이유는 담고 있는 내용이 논쟁적인 것이라서가 아니었다. 형식에 대한 야심이 보이지 않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다큐멘터리 중 한 편일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과 같은 작품이 당당히 드러내는 공격적인 추론, 아랍권을 대상으로 한 미국 대통령의 전쟁결정은 그 집안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대담한 주장과 비교될 만한 것이 이 영화에는 없다. 그저 반론 당사자들의 확신에 찬 주장을 겸손하게 경청하고 그게 맞는 것일까라고 질문하는 편이다. 그들의 반론에 대응하는 정부당국의 답변이 외부에서 보기에는 상식적으로 의문가는 지점이 꽤 있다는 게 이 다큐멘터리가 지적하는 결론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만으로도 현재의 한국사회에선 논쟁적인 휘발성이 충분히 있다는 걸 감안해 전주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결정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이 판단은 현재 한국사회의 관용을 너무 높게 평가했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누군가 정부 발표를 믿지 않고 북한이 천안함을 격침했다는 결론을 부정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이 영화를 종북 지향이라고 단정지었다. 불행히도 이 영화를 만들기 전의 상황에서 한국사회는 전혀 이 사안에 대해 진전된 인식을 이룬 바 없고 오히려 더 단단히 경직돼 버렸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정지영 감독은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인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종북이라고 단정하는 지상파 시사 대담 프로그램을 보고 이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심했다고 말한 바 있다. 정확히 똑같은 일이 영화 개봉 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연출자인 백승우 감독도 비슷한 말을 했다. 헌법 재판관 후보자인 덕망있는 모 법조인이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는 국회의원의 질문에 신중하게 답변했다는 이유만으로 인사에서 낙마하는 걸 보고 그는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을 결심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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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이틀만에 상영철회 방침을 배급대행사에 일방적으로 통고하면서, 메가박스는 불특정 다수의 협박전화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관객의 안전을 고려한 조치라고도 했다. 극장 측의 이 어리석은 조치에 관해서는 이미 영화계와 많은 예술계, 시민단체의 항의 발표가 있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부연하지 않겠다. 다만, 불특정 다수라고 극장 측에서 발표한 수많은 겁박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동연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은 한겨레 21에 실린 글에서 ‘우익행동대’의 존재를 언급했다. 메가박스의 해명이 사실이라면 지난 10여 년 간 꾸준히 세를 확장해온 보수시민단체들이 극장 측에 겁박을 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보수시민단체의 대변인을 자임하는 변희재씨는 트위터를 통해 메가박스의 해명은 사실이 아니라고 공표했다. 오히려 그는 극장측이 <천안함 프로젝트>의 흥행부진으로 인한 상영 최소 결정을 자신들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극장 측에서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결정을 내렸는데 그들로 하여금 겁에 질려 허둥지둥 조치를 취하게 만든 세력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초현실적인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어떤 일이 막후에 벌어졌다 해도 메가박스 극장 측의 제작사 입장을 도외시한 일방적인 결정은 실질적인 검열의 대리인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극장은 제작사와 협력 파트너로 계약을 맺고 영업을 하는 사업주체이다. 영업방해를 협박하는 불특정 다수에게 밀려 영업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극장의 영업에 국한되는 일 뿐만이 아니라 제작사의 영업과도 관계되는 일이다. 남의 영업장에 함부로 침입해서 그 영화를 진지하게 존중하고 관람하는 다른 관객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영화상영을 방해하겠다고 위협하는 불특정다수는 사법권의 심판을 받게 하면 될 일이다. 관객의 안전을 고려해야겠다고 말하는데 극장에서 상영되는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문화상품은 적대적인 관객뿐만 아니라 우호적인 관객을 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무시하는 어떤 관객들의 협박에 대해 무생물처럼 가만히 당하고 있을 존재들이 아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입장이 한 극장에서 충돌하는 일은 관람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관람환경이 충족되지 않으면 극장 측은 관람환경이 구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예비하면 되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검열은 한국사회에서 사문화된 용어다. 1996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은 후 한국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데 따르는 제약은 등급을 결정하는 심의형태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천안함 프로젝트>는 영등위로부터 12세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영화상영을 저지하려는 소송시도도 있었지만 법원으로부터 기각당했다. 적어도 한국의 행정 사법 체계에서 <천안함 프로젝트>의 상영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메가박스가 이 영화의 상영을 취소한 후 이 영화를 문제시하는 진영의 입장에선 흥미로운 문제제기가 했다. 실제적으로 일어난 일은 어떤 부당한 힘의 압력행사에 따른 상영최소인데도 그들은 이 영화가 저조한 관객동원을 기록중이었으니 상영취소한 것은 당연하다는 암시를 퍼트린 것이다. 이 영화가 다양성 영화 관객동원에서 1위를 기록 중이었다는 것을 교묘하게 은폐하면서 말이다. 
 
이번 사태가 가르쳐주는 교훈은 우리 안에 내면화된 검열에 관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힘의 실체를 믿고 불특정 다수로 표현되는, 심지어 조작된 것으로 의심되는 인터넷 상의 여론이 그걸 알려주는 지표이다. <천안함 프로젝트>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면서 논란을 일으켰을 때 인터넷 댓글판은 이 영화를 저주하는 공격적인 말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이 영화가 정식 극장 개봉한 이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불행하게도 <천안함 프로젝트>가 영화 속에서 근심하는 합리적인 소통의 가능성은 영화 바깥의 사회적 맥락에서 더 불가능성의 영역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건 자연발생적인 현상만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난무하는 공격적인 언어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익명성의 그늘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매도하는 공격적인 표현들로 인터넷을 도배한다. 그들은 상대의 주장을 공격하지만 상대의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가 우리 편이 아니고 우리 편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와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라고 생각한다. 자기 말이 아무리 부정확하고 조리가 서지 않아도 절대 다수의 공동작업의 일환이니까 자신의 말이 단순한 욕설과 비난의 말 뿐이어도 상관이 없는 다고 생각한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주류 집단의 큰 존재에 자기를 투사해버리는, 그럼으로써 자기를 지우는 매우 퇴행적이고 위험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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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미디어오늘>
 
<천안함 프로젝트>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 영화다. 이 영화의 제작진은 자기를 드러내고 만들었다. 자기의 이름과 몸을 내세우고 ‘이런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라고 세상에 말을 걸었다. 그런데 자기의 고유성을 드러내지 않는 어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 비열하게 돌을 던지고 있다.
 
지금 이 사회에선 각 분야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한 사회에서 공존하는 데는 예의가 필요하다. 대선 결과에서 드러나듯이 그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의 세력은 비슷하다. 그런데 한 쪽의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은 절대 다수의 힘을 지녔다고 착각하고 힘을 남용해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을 누르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실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모두 익명의 우산 속에 숨어 있다.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도 한낱 필부들도 마찬가지이다. 알아서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마녀사냥이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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