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동민의 ‘어떤 하루’ (25호)

2013년 8월 29일culturalaction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동민의 ‘어떤 하루’
꽃섬(시민자치문화센터)
8월 22일 늦은 여름, 종로구에 있는 성곡미술관을 찾았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동민 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동민 씨는 미술관 카페에서 김밥을 먹고 있었다. 내게 김밥을 함께 먹자며 수줍게 웃었다. 내가 성곡미술관은 처음 와본다며, “미술관이 참 예쁘네요.” 했더니 동민 씨는 인생에서 미술관에 와본 게 처음이란다. 구본주 전시회 준비를 도와주려고 성곡미술관을 찾은 그는 언론이나 SNS를 통해 보았던, 따뜻한 느낌이 그대로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꾸미기_고동민과 윤엽.JPG
꽃섬: 동민 씨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 생각하다 동민 씨의 일상이 궁금해졌어요. 어쩌면 해고 이후 평범한 일상이 붕괴되었을 것 같긴 하지만, 대한문에서의 삶, 해고된 이후,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어떤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상이 어떠냐는 질문은 막연하니, 어떤 월요일, 8월 12일은 어땠는지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동민: 우리에게는 삶의 리듬이 없어요. 매일 분향하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고, 대한문에서 지내다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 월요일, 화요일, 아침걸음걸이가 달라요. 우리한테는 월요병이 없어요. 매일이 일요일같죠. 일을 하고 주말에 쉬고, 쉬고 나서, 다시 찾아오는 피곤하고 힘든 월요병과 같은 일상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해고된 이후 우리의 일상은 매일매일이 다르지만 매일매일이 똑같죠. 8월 12일엔 아이들, 옆지기와 함께 함양으로 휴가를 갔어요. 지인의 소개로 다녀왔는데 참 좋았어요. 고기, 과일 등을 사서 맛있게 먹고, 애들 재우고, 오랜만에 옆지기랑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의 전화를 받았어요. 공장에서 일할 때 비정규직에 대한 생각의 차이로 사이가 멀어졌었던 관계인데, 그 친구가 희망퇴직한 후 더 사이가 멀어졌었죠. 그런 관계의 친구가 5년 만에 전화를 했어요. 아마 대한문에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제게 전화한 것 같은데, 그 친구가 힘들다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저는 친구가 힘들다고 얘기하는데도 무덤덤하고 나른하게 전화를 받았죠. 그러다 그 친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도 아무얘기를 할 수가 없더라구요, 아주 무덤덤하고 나른하게 “좋은 날 오겠지.”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게 지금까지 잔상으로 남아있어요. 죽음의 공포가 옛날 앨범 들춰보듯 다시 느껴진 날이었어요. 오랜만에 가족과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에게 그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대한문으로 왔는데, 자다가 새벽에 이 마음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음의 공포를, 무덤덤하고 나른하게 전화를 받았던 그 잔상을 떨쳐내기 위해 기고글을 썼어요. 24일 범국민대회에 와달라는 기고글이요. 대한문 분향소를 빼앗기고 난 후, 제게는 죽음의 공포가 근원적으로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왜 우리는 열심히 사는데 죽어나가는지”란 생각도 하게 되고 죄책감도 들어요. 하루하루를 무덤덤하게 일부는 웃고, 일부는 울면서 보내고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대한문에 가요. 9시쯤 나가서. 적막하고 초라한. 피켓으로 만든 분향소를 보고 있으면, “이걸 왜 하는 거지?” 이런 생각도 들죠. 그러다 최근에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참여한 후 ‘새로운 마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강정엔 싸움의 현장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더라구요. 대한문에서는 막 빨리 걷다가 문득 돌아서 모금을 하는 시민, 대한문 분향소에 개입하는 순간들이 포착되는데, 강정엔 사람들이 별로 없더라구요,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서 사람들도 없는데, “우린 왜 걷지?”, 처음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계속 걷다보니까 알겠더라구요, 처음엔 제주 사람들이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오지도 않았는데, 대행진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나니까 주민들이 스스로 힘을 내더라구요. 자라면 자고, 걸으라면 걷는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참여하면서_대한문에서는 항상 일하고, 기획하고 그랬는데, 누가 시키는대로 아무 생각없이 걷다보니까_새로운 희망,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보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이것이고, 그래서 걷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누군가는 대한문에 있지 말고, 시청광장에 가라고도 하는데, 대한문에서 버틸 수밖에 없는 우리 마음. 어떤 새로운 기획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자신, 그리고 우리가 새로워져야 한다라는 걸 깨달았어요. 어릴 때 연극을 했었는데, 그때 저는 수줍은 아이였는데 연극을 하면서 쾌활해지고, 자신감이 생겼었어요.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는 느낌. 강정생명평화대행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변명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어떤 기획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새로운 기획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패배감이 뿌리깊게 있는 게 문제라는 것, 우리가 자신감을 갖고 있지 못한 것, 새로운 마음에 대한 열망들. 자기 스스로에 대한 변화가 중요한 것 같아요.
꽃섬: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날이 있다면, 그 하루동안의 마음을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동민: 18일 일요일에 평택에 있었는데, 아이들이 개학을 했어요. 집에 있는 날엔 제가 아침밥을 하는데, 이날엔 밥을 하기 싫어서 “밥을 나가서 사 먹으면 어떻겠냐. 애들아 뭐하니?”, 말하면서 비비적거리다가 아침을 먹고 영화를 보러갔어요. 옆지기가 하정우를 좋아해서, 옆지기는 ‘더테러라이브’를 보고, 전 아이들과 만화영화를 봤어요. 개인적으로 코난, 도라이몽과 같은 만화영화 더 이상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영화를 보고 싶은데, 아이들과 계속 만화영화를 봐야 해서요 하하하. 만화영화가 먼저 끝나서, 아이들과 놀이터에 가서 옆지기를 기다렸어요. 가족들과 함께 있는데도 대한문은 저한테 촉수처럼 잊을 수 없는 공간이에요. 대한문의 상황을 항상 확인하죠. 이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역할이 분업화되어 있고, 다들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데도 대한문엔 항상 신경이 쓰여요. 마치 대한문이라는 공간과 제가 길다란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 집에 왔는데, 아이들이 방학숙제를 안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아이들과 방학숙제를 하는데, 아이들 옆에서 “숙제를 계속해야 돼.”하며 12시까지 아이들에게 숙제를 하도록 시켰어요. 저 어렸을 때 구구단과 한글을 떼겠다고 엄하게 아버지가 나를 교육해서 그런지, 옆지기는 숙제를 안할 수도 있지 않냐고 하는데 “저는 어떻게 숙제를 안할 수 있냐”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아이들 숙제가 끝나고, 아이들을 재운 후 범국민대회 기고글을 정리하다 대한문으로 올라왔어요. 아이들과 있는 시간은 오롯이 기억할 수 있어요. 오롯이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 이 하루를 설명하는 것 같아요.
대한문에서는 집회하고, SNS에 사진올리면서 바쁘게 살지만, 대한문에서의 시간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저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게 꿈이거든요. 어렸을 때 연극을 한다고 해서 아버지랑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항상 어려웠고 우린 어색한 부자관계였지요. 그런데 둘째를 났을 때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서 울었어요.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저랑 뜀박질하고 내기같은 거 할 때 일부러 져주지 않으셨어요. 엄하고 무섭고, 웃음기가 없는 아버지였죠.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사는 게 힘들고, 일상이 폭력처럼 느껴지는, 엄한 아버지와 달리 저는 아이들에게 신나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꽃섬: 아이들은 아버지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고 있나요?
동민: 네. 알고 있어요. 경찰이 옥쇄 파업 때 공장에서 삼촌들과 아빠를 때렸고, 회사에서 해고당한 것도 알고 있어요. 쌍용자동차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서울에 가는 것도 알고 있어요. 처음엔 아이들이 “왜 서울에 가냐?”고 물었죠. 다행히 옆지기가 아이들에게 설명해줘서, 전 아이들에게 이해받고 있는 아빠에요.
꾸미기_고동민.JPG
꽃섬: 대한문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동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에요. 대한문에 있으면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인생을 허비하는 거 아니야?”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또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할 때도 힘들죠. 처음에 대한문 시민상주단을 제안했을 때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형들이, “사람들이 오겠냐?”며 확신없어 했어요. 그런데 “사람마음은 눈덩이처럼 굴려지는 것이니, 좀만 기다려 보자”고 했죠. 기다리니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수요일마다 시민상주단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 시민상주단을 하겠다는 그 문자를 보고 마음이 울컥거렸어요. 지금은 인권활동가들이 화요일에 시민상주단을 하고 있고, 시민상주단이 채워져가고 있어요. 가끔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뻔한 질문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다른 삶의 방법이 없기 때문에 버티고 있어요. 쌍용자동차의 어떤 형이 “자신은 쌍용자동차밖에 들어갈 데가 없다”라는 말을 했어요. 일자리를 못찾고 있는 분들도 많구요. 다른 일을 알아보고 있는 해고노동자들 중에는 4대보험도 필요없으니 일만 시켜달라고 면접 볼 때 이야기한대요. 4대보험도 포기하고 일을 찾아야 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죠. 그런데 이런 현실이 있는데도, “왜 다른 일을 하지 않냐”는 질문을 들을 때 힘들어요. 질문과는 좀 다른 얘기인데, 과거에 아버지가 “연극을 언제까지 할 거냐”고 했을 때, 전 아버지에게 “무대에서 죽고싶다”고 대답하고, 도망쳤어요. “나도 가난한 아버지처럼 되는 건 아닐까?”란 두려움 때문에 현실에서 도망쳤죠. 그때는 연극영화과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어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공포에서 도망가고 싶었죠. 그러다 쌍용자동차에 입사했을 때 가난에서 해방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게는 쌍용자동차가 새로운 세상이었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구요. 평생을 가난했던 아버지가, 집의 문패를 만들어서 집을 처음 가져본다며 술을 마시고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제게 가난은 문패와 같은 것이에요. 집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제게 있어요. “문패 하나는 갖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거죠.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집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도덕적으로 금기시되어 있는데, 30년동안 일해서 아파트를 가졌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해고되어서 아파트를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겪는 노동자는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을 경험하죠. 그 마음은 가난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에요.
꽃섬: 너무 일반적인 질문이긴 한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뭐에요?
동민: 쌍용자동차 형들하고 다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해요. 노래를 함께 부르고 춤을 같이 출 때 행복해요. 그리고 아이들과 노는 것도 좋아요. 제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사이에서 막내인데 친한 형도 있고, 서먹서먹한 형도 있거든요. 일을 많이 하니까 성질도 부리게 되고 그래서 친하지 않는 형들도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다같이 무언가를 할 때 행복해요. 싫어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에요. 싸움이든 전술이든, 내 의지로든 타의로든, 포기하는 것을 싫어해요. 제가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장이 “오늘 싸우지 않으면 내일도 싸울 수 없다”이거든요,
꽃섬: 복직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동민: “소를 잡고 싶어요”, 공장안에서 소를 잡고 싶어요. 투쟁승리보고대회라고 설명할 수 있겠죠. 옥쇄파업 후 구치소에서 6개월 있었는데, 구치소에서 나온 후에 만두 300개를 빚어서 사람들을 초대했어요. 사람들 20명씩 3번 불러서 만둣국을 함께 먹었어요. 복직이 되면 공장안에서 소를 잡든 만둣국을 끓이든 함께 하고 싶어요. 싸움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파티를 하는 거죠. 이 싸움을 우리만의 승리나 복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이 싸움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보태져 있어요.
꽃섬: 8월 24일 범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동민: 사람들이 새로움 마음으로 왔으면 좋겠어요. “집회한다고 해결되겠어? 이런다고 정부가 국정조사하겠어?” 이런 패배감으로 참여하지 않고, 새로운 마음으로 왔으면 좋겠어요. 쌍용자동차는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조탄압, 죽음 등 모든 문제가 집약되어 있는 사업장이에요. 잘 안될 것이라는 패배감이나 의문말고, “될 수 있게 해보자”라는 그런 확신으로 범국민대회에 왔으면 좋겠어요.
꽃섬: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 주실래요?
동민: 본인을 노동자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대한문에 있으면 “나는 시민인데, 너는 노동자고 내가 연대하는 거야.”라는 태도로 접근하시는 분이 많아요. 우리 모두가 노동자죠. 그게 한걸음 나아가는 사고의 전환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에요. 존엄해지고 싶어서 이 싸움을 하고 있어요.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고,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세상의 모순에 맞서서 싸우는 과정에 있고, 스스로에 대한 존엄을 지키고 있는 중입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이날 인터뷰를 하기 전, 우린 함께 구본주 전시를 보았다. 이윤엽 판화가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전시장에서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란 조각상을 보며, 울컥거리는 마음을 쓰다듬는 동민 씨를 보며, 동민 씨가 말하는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이라는 그 말이 계속 생각났던 하루였다. 신나는 아빠가 되고 싶다는 그의 꿈을, 자신에게 항상 자신감있고 당당한 옆지기와 오롯이 기억나는 하루를 보내고 싶은 그의 소망을,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우리 자신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기억하고, 살아내기로 한, 어떤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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