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인터뷰] 인문학협동조합, 더 좋은 인문학을 갈망한다는 것(22호)
[편집자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들은 매일 같이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해보면 왜 배워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 가도 학점을 더 높혀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방법을 배울 뿐입니다. 이쯤되면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지식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에 그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지식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정말 단순히 취업을 위한 도구일 뿐일까요? 여기에 앎을 자신의 삶으로, 그리고 자신의 삶을 앎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지식공동체들이 있습니다. 2000년 이후 이런 움직임이 있었지만 근래들어 절망적인 현실에 저항하고 대안을 내놓으려 하는 다양한 지식공동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식공동체는 무엇이고, 왜 생겨났을까요? 지식공동체들이 활발하게 등장하고 있는 시기인 만큼 이번 호 ‘문화빵’에서는 이 공동체들의 문제의식을 살펴보려 합니다.
① 움직여라, 달라질 것이다―지식협동조합과 대학의 종말 / 권경우(문화평론가, 문화사회연구소)
② [인터뷰]땡땡책협동조합, 사회적 독서를 고민하다 / 정리 : 최혁규(문화연대)
③ [인터뷰]인문학협동조합, 더 좋은 인문학을 갈망한다는 것 / 정리 : 최혁규(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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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2호
[인터뷰]인문학협동조합, 더 좋은 인문학을 갈망한다는 것
정리 : 최혁규(문화연대)
최혁규: 인문학협동조합은 연구공동체나 지식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아직 설립되기 이전의 협동조합인데 그만큼 첨예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있을 것 같다. 준비모임인 “뭉치자 닷컴”을 보면 협동조합 설립을 위한 토론과 회의를 자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문학협동조합의 문제의식이 궁금하다.
임태훈: 한국 고등교육의 패러다임과 대학 기업의 기본정책 방향은 정권이 어느 쪽으로 바꿔도 쉽사리 바뀌지 않는 구조다. 이 구조에 종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조 자체이기도 한 현재의 학술장은 소수의 ‘정규직’과 대다수 ‘잉여’로 구성된 장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여기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지난 수년 간의 시간이었다. 대학 기업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나날이 강화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불안을 느끼면서 ‘논문 편수’를 채근당해야 하는 연구자들에게 삶과 공부는 분리된 지 오래다. 이대로라면 삶 자체와 인문학의 장래는 암담하기 짝이 없다.
이런 현실에 가장 분개하고 무엇이라도 해야 하겠다고 각성한 이들을 중심으로 올 2월부터 인문학 협동조합 출범의 뜻을 모았다. 30대 초중반의 신진세대들이 주축이 되었다. 주로 박사 과정생, 박사 수료생, 시간 강사 등이다. 그리고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10여 명의 전임교수가 서포터즈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97명이 준비위에 모였고 분과별로 실무를 맡고 계시는 분은 20여 명이다. 참가 인원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출판ㆍ예술 노동자를 비롯해 대학이 아닌 다양한 분야에 있는 분들과 연대하고 싶다. 구성원의 다양성이 커질수록 인문학 협동조합에서 실현할 수 있는 ‘인문학’의 의미도 확장될 것이다.
인문학 협동조합은 대학과 학술장이 결코 하려 하지 않는 인문학, 해야 함에도 하지 않는 인문학을 실현할 것이다. 제도의 규격에 마름질하느라 잘려나가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인문학적 상상력의 복원을 지향한다. 이를 통해 연구와 삶의 일치와 공존을 지향할 것이다. 이것은 무한경쟁과 성과주의의 룰에 휘어 잡힌 기존 제도를 비판적으로 상대화시킬 수 있는 외부를 구축하는 일이다. 지금의 대학은 대학끼리 순위 경쟁에 몰두하고 있다. 대학은 대학 바깥의 인문학을 눈치 보지 않는다. 대학 바깥의 인문학이라고 해봐야 언제 철거될지 모를 풍찬 노숙지에 불과하거나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 자족적인 모임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학 기업과 학술장, 한국 고등교육이 결핍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비춰낼 수 있는 거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 협동조합이라는 이 거울을 대학뿐만 아니라 ‘더 좋은 인문학’을 갈망하는 모든 이가 들여다볼 수 있게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대학 안팎의 인문학에 원하는 게 많아질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 이를 통해 현행 제도의 패러다임 변화를 유도하려 한다.
최혁규: 바깥 공간을 구축한다는 게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자신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바깥 공간을 구축하는 방법에 있어서 이것이 기존에 행해졌던 것처럼 마냥 심오하고 진지한 방법이거나 계몽의 방법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스스로 즐길 수 있게끔 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임태훈: 그런 면에서 웃음이 중요하다고 본다. 세월이 흘러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지긋지긋한 세상의 한가운데서, 참을 수 없는 폭소를 선사할 광대를 만들어내는 일은 인문학 운동과 별개일 수 없다. 지배질서에 순응된 웃음과 눈물이 아니다. 두려워 울었던 것에 웃을 수 있게 되고, 웃으며 간절히 선망했던 것을 조롱할 수 있게 되는 새로운 이해와 공감의 순간이다. 박장대소할 때 온몸에 진동이 퍼져나간다. 바로 이 순간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인문학 운동이다.
우리도 잘 웃으려고 한다. 인문학협동조합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걸 진실로 믿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경멸받아 마땅한 광대가 아닐 수 없다. 인문학협동조합은 전도유망한 성공의 자리 대신에, 만사를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투기꾼의 언어를 비웃는 자리에 서서 해야 할 일을 뚜벅뚜벅해나갈 것이다. 몇 번의 실패가 있을 수 있다. 전혀 두렵지 않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럼 더 잘 실패할 수 있다. 우리들의 지난 실패에 대해 가장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이도 우리일 것이다.
내 생각에 가장 정치적인 유머는 상상력과 파상력 사이의 긴장이 비결이다. 인문학의 상상력은 파상력과 같이 움직여야 한다. 다시 말해, 꿈꾸는 힘뿐만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는 힘이 긴장감 있게 발휘되어야 한다. 또한 웃음은 몸을 뒤흔들 뿐 아니라 그가 거한 장소도 함께 진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장소도 꿈을 꾼다. 신자유주의의 꿈은 우리를 둘러싼 사물의 질서에 흥건히 스며들어 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스펙터클한 정치적 이벤트는 멀리서 볼 땐 엄청난 변화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듯싶지만, 오랫동안 관성화 된 일상의 억압적 리듬을 바꾸는 일에는 놀랍도록 무능하다. 그러니 광장보다는 분자화 된 정치의 장소들을 주목해야 한다. 새로운 웃음의 잠재력이 그곳에 있다. 가장 일상적인 장소가 가장 정치적인 장소다. 내가 먹고 입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모든 문제가 다 정치의 문제다. 인문학 운동은 바로 여기서 기획되어야 한다. 그동안 내 삶이 원하는 앎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음을 알게 되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그런 공부를 하면서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혁규: 맞다. 기존의 운동들을 거대 이슈에 대한 스펙타클이나 진정성만을 강조하면서 경직된 면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 만큼 내재적으로는 이런 걸 부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지금의 세대들은 기성세대와는 다른 방법들을 고려할 것 같다. 그렇다면 왜 협동조합인가? 2012년 말에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고 나서 협동조합을 만드는 붐이 있긴 하지만 인문학협동조합의 정치성을 봤을 때 협동조합기본법 내에는 정치 참여 금지 등의 독소조항들이 있다.
임태훈: 유령처럼 2013년 한국을 떠돌아다니는 상상의 ‘협동조합’이 있다.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협동조합은 어쨌거나 자본주의의 보안재이며, 기본법에도 정치적 급진화를 막는 독소 조항이 있다. 그럼에도 ‘협동조합이란 유령의 이미지’를 최대한 선용할 수 필요는 있겠다. 사람들을 연대하고 협동하게 만드는 일에 ’협동조합‘은 ’정당‘ 따위의 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유령의 쓸모는 여기까지일 것이다. 이미 결성되었거나 결성을 준비하고 있는 협동조합이 지속 가능한 활동을 이어나가려면 꿈에만 홀려 있어선 안 된다. 아까도 말했지만 파상력이 필요하다.
인문학협동조합에는 반드시 현실화시켜야 할 두 가지 목표가 있다. 협동조합은 경제적 활동, 즉 사업이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사업 모델을 통해 수입을 창출하고 조합원들과 이득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조합원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내야 한다. 대학 바깥으로 밀려나면 연구자의 삶은 끝장이라는 불안을 줄일 수 있는 노력을 인문학협동조합은 꾸준히 해나갈 것이다. 아주 어려운 과제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장 뤽 고다르가 영화인들을 향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영화는 꿈이다. 그래서 당신은 꿈꾸지 않아야 한다.”
최혁규: 결사체로서의 협동조합, 사업체로서의 협동조합이 그런 부분들을 뜻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요즘 가만히 보면 서로 비슷한 협동조합들끼리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협동조합들도 협동조합들끼리 협동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런 부분들이 궁금하다. 인문학협동조합이 지식공동체로서 어떤 각오를 하고 있는가? 그리고 다른 지식공동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려 하는가?
임태훈: 이미 많은 연구 공동체들이 있다. 단언컨대 그들과 경쟁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들을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크나 허브의 역할을 인문학 협동조합이 맡고 싶다. 이와 관련해 2014년 봄을 목표로 연례행사로 진행하려는 대형 프로그램이 있다. 지금은 세세한 이야기를 드러낼 단계가 아니니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출판과 강좌 시장의 파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은 연대와 협력을 통해 이 파이를 키우는 일이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