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움직여라, 달라질 것이다 -지식협동조합과 대학의 종말(22호)

2013년 7월 19일culturalaction
[편집자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들은 매일 같이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해보면 왜 배워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 가도 학점을 더 높혀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방법을 배울 뿐입니다. 이쯤되면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지식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에 그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지식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정말 단순히 취업을 위한 도구일 뿐일까요? 여기에 앎을 자신의 삶으로, 그리고 자신의 삶을 앎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지식공동체들이 있습니다. 2000년 이후 이런 움직임이 있었지만 근래들어 절망적인 현실에 저항하고 대안을 내놓으려 하는 다양한 지식공동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식공동체는 무엇이고, 왜 생겨났을까요? 지식공동체들이 활발하게 등장하고 있는 시기인 만큼 이번 호 ‘문화빵’에서는 이 공동체들의 문제의식을 살펴보려 합니다. 
① 움직여라, 달라질 것이다―지식협동조합과 대학의 종말 / 권경우(문화평론가, 문화사회연구소)
② [인터뷰]땡땡책협동조합, 사회적 독서를 고민하다 / 정리 : 최혁규(문화연대)
③ [인터뷰]인문학협동조합, 더 좋은 인문학을 갈망한다는 것 / 정리 : 최혁규(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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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2호
 
움직여라, 달라질 것이다
-지식협동조합과 대학의 종말
 
 
 
 
권경우(문화평론가, 문화사회연구소)
 
 
최근 대학사회는 학과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대학사회의 움직임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대학 평가와 취업률, 인기학과 등의 기준으로 학과 폐지 혹은 통폐합 등의 시도가 있었고, 일부 대학에서는 대학당국과 교수, 학생들이 충돌을 겪으면서 심한 몸살을 앓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직접 상관이 없는 대부분의 대학구성원들은 물 건너 불 구경 하듯 남의 일로 치부할 따름이었다. 그것은 방관이거나 묵인이었으며, 대학언론이 비슷한 상황에서 탄압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로 반복되었다. 최근에 강원도 어느 대학에서는 국어국문학과가 사라지고 한국에 유학 온 외국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과와 통폐합되어 전혀 다른 성격의 학과로 바뀌었다. 청주의 한 대학에서는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미술학과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음악대학 역시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경남대의 경우에는 철학과 폐지가 확정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일부는 다른 학과가 사라질 때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속한 학과의 일이 아니니까 굳이 신경쓸 필요 없어. 내 앞가림 하기도 바쁜데…… 그리고 설마 우리 과가 없어지기야 하겠어? 유럽어학과도 아니고 명색이 ‘국문학과’인데 말야.” “우리 학과는 역사와 전통이 수십 년이나 되었는데, 설마 폐과시키진 않겠지.” 등등. 하지만 현실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그 학과에 속한 이들은 반복되는 무관심 속에 SNS와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연대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대학사회의 모습은 방관이나 묵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방관이나 묵인은 비록 그 상황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현재 나의 상황이나 사정이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나치거나 눈을 감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대학사회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다양한 변화들은 묵인이나 방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지나 동의에 가깝다. 이는 대학사회를 구성하는 청년세대의 변화, 대학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의 변화를 아우르는 환경적 요인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사례는 그나마 재학생을 비롯한 동문, 교수들의 저항과 싸움이 있어서 미디어나 SNS를 통해 외부로 알려진 경우이다. 2년제 대학 등 재학생 수가 적거나 동문회 등이 조직되어 있지 않은 학과는 조용히 사라지고 마는 운명을 겪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주로 인문학과 예술 등 기초학문이나 ‘복지’ 등의 이름을 내건 유사학과 등이 주요 대상이다. 일단 그러한 학과를 폐지하고자 한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 구성원들과 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되는 대학사회의 구조조정은 말 그대로 ‘속도전’으로 처리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학과폐지와 구조조정의 경쟁이 아니다. 오히려 각 대학이 머리를 맞대고 대학사회 전반적으로 유사학과 혹은 중복학과가 왜 그렇게 많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대학을 믿고 입학한 학생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문제의 정점에는 교육부가 있음은 물론이다. 취업률과 같은 계량화된 대학평가가 아니라 인문사회계열이나 예술계열 학과에서도 납득할 수 있는 평가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방식 역시 대학 간 경쟁 위주로 이뤄지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형태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학의 절망적인 현실은 지식 사회에 새로운 자극이 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근래 들어 새로운 형태와 방식을 꾀하는 다양한 지식공동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연구공동체 자체 지향하거나 유행하고 있는 협동조합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혹은 궁극적으로 지금의 대학을 넘어서는 대안적 대학의 설립을 꿈꾸기도 한다. 일련의 흐름을 보면 이러한 모습이 새로운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2000년대 이후 제도권 및 대학에 비판적인 연구자들이 새로운 학문공동체를 설립한 적이 있다. 대표적으로 ‘연구공간 수유+너머’나 ‘다중지성의 정원(다지원)’ 그리고 철학아카데미 등은 나름의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중 꾸준하게 운영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다지원 정도라고 볼 수 있는데, 다른 공동체들은 대부분 규모가 축소되거나 분화 혹은 해체 등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물론 지식공동체 혹은 연구공동체의 실험을 단순하게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을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공동체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현재 같은 공간에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은 또 다른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안연구공동체가 현실적으로 제도권 혹은 대학의 시스템을 바꾸거나 영향을 끼치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등장하는 지식공동체는 대학 혹은 제도권이라는 명확한 대당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식생산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와 대안의 성격을 띤다는 특징을 갖는다.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시민대학, 급진민주주의 연구모임 데모스(Demos), 부산지역 연구모임 아프꼼(aff-com), 인문학협동조합, 학습협동조합 ‘사유와 실천의 공동체 가장자리’, 지식협동조합 ‘좋은 나라’, ○○책협동조합 등이 이미 결성되었거나 가시화되고 있는 형태들이다. 그 외에도 각 지역과 단체, 개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지식공동체가 꾸려지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를 조직하는 주체들의 판단은 대학과 제도권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지금의 대학은 대안적인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재생산의 시스템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대학 외부에서 그러한 공간과 시스템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움직임의 공통점은 ‘탈대학’이라는 특정한 경향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대학에 대한 일종의 ‘환멸’ 혹은 ‘포기’를 선언하는 것에 가깝다. 인문학의 죽음, 비리 사학 재단의 복귀, 강사법의 표류 등 대학의 암울한 현실을 접하면서 좌절과 절망 가운데 새로운 공통의 정서를 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금의 활동이 향후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국 대학의 비효율적인 학문제도와 교육시스템을 벗어나 자유로운 학문 연구와 공동 작업을 통한 협력시스템을 가동시킨다면 기존의 대학과 제도권의 지식생산과는 다른 새로운 틀과 성과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소비 과정을 넘어서는 생산 과정을 어떻게 구축하는가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학문 제도와 개혁을 주장하는 많은 논자들이 ‘대학 개혁’을 강조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라도 현재 나타나고 있는 지식공동체의 다양한 실험이 대학이라는 문제적 공간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으로 거듭날 것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지금과 같은 ‘탈대학’이라는 흐름이 과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식생산 시스템이 중요하기 때문에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것 못지않게 역설적으로 그 지점에서 대학공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식생산의 장으로서 대학이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핵심적인 공간이 됨으로써 지식생산을 둘러싼 논쟁과 대안은 지속적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이미 대중교육의 장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대학을 둘러싼 입시제도와 대학 및 대학원 교육에 대한 개입과 저항을 지속하지 않는다면,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더욱 치밀하게 지배할 것이며 보수적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단순 비교라는 위험성을 감안한다면, 중등교육의 차원에서의 공교육과 대안교육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공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함으로써 대안교육에 집중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현실적으로 대안교육이 아무리 성공한다 할지라도 공교육 시스템은 여전히 지속되며, 대부분의 평범한 아이들은 공교육을 벗어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자식’만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공교육의 문제점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탈대학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이 시대는 어쩌면 그와 동시에 대학공간에서 지식생산의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학의 내부와 외부에서 대학을 바꾸는 운동의 효과를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그 효과와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의 위기, 대학의 죽음, 대학의 종말이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특정한 형태의 대학이 사라질 뿐이다. 그리고 대학은 끊임없이 자본의 요구와 부응에 따라 변태를 거듭할 것이다. 대학의 죽음이 공공연하게 유포되는 지금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대학이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때인지도 모른다. 누가 할 것인가? 그것은 대학에 남아 있는 ‘한 줌의 지식인들’이다. 그들이 먼저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대학 외부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내부에서 힘들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 힘들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지금은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이 글은 <웹진 문화多>에 실린 글을 수정․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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