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인 것들]사회적경제를 둘러싼 동상이몽(32호)

2014년 2월 11일culturalaction
[사회적인 것들]32호
사회적경제를 둘러싼 동상이몽
양기민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최근 ‘짝’의 한 출연자 사례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골드미스 특집(2014년 2월 5일 방송분)에 나온 여자 2호와 남자 2호가 ‘사회적기업’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가치관과 공통점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인 고려대 출신의 여자 2호는 그동안 키, 외모, 학력 등 조건에 맞는 남성들을 많이 만나왔지만, 이번 계기로 배우자 선택에 ‘대화’가 통하는 것이 중요하단 걸 깨달았다 한다.
지난 국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새누리당의 황우여 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를 구현하겠다고 하였고, 다음날 민주당의 김한길 대표는 공감과 환영의 뜻을 밝히며,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위한 본격적인 정책 수립에 여야가 함께하자며 ‘사회적 시장경제 특위’를 구성하자 제안하였다. 여러 정치적인 사안이 얽혀 갈등이 풀어지지 않는 여야도 이러한 주제로 대화가 통한 것일까?
낭만적인 연애와 현실 정치가 어쩌다 사회적경제를 대화 주제로 우연히 만나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흥미로웠다. 그만큼 사회적경제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사회적경제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기존 시장 중심 경제로는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저성장, 양극화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사회적경제는 유일한 대안은 아니지만, 지나갈 유행으로 평가절하하기도 어렵다. 지금 우리에게 해답보다는 같은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 우선이다. 사회적경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경제의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대화의 시작일 뿐이다.
학벌 좋은 여자 2호, 남자 2호를 대중 지성인으로 보이게 만들고, 분쟁하는 정치권을 화합하는 모양새로 보이기에 사회적경제는 고품격 대화의 소재가 되었다. 사회적경제 자체가 발전하기 위해서 좀 더 많은 사람의 관심과 정치적 당파성을 넘는 협력도 필요하다. 그래서 사회적경제에 대한 논의가 많아지고 있지만, 점점 ‘사회적경제’라는 담론 소비가 일부 계층에 한정되거나 실체화되지 못하고 점점 추상화되는 경향이 문제이다.
단지 같은 주제로 대화 한다고 해서 서로가 통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남녀 간 대화에서도 처음에는 서로의 관심과 취향을 맞춰보기 위해 여러 주제를 주변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이후 넘어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한다. 그 차이점을 극복하여야 신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번 정치권에서의 대화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사회적경제가 아닌 ‘사회적 시장경제’라며 강조하였다. 연대와 협력을 기반을 목표로 한 기존 사회적경제에 ‘시장’이 강조될 때 결과와 목표치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의도를 알면서도 침묵하는 것은 우리는 이미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는 듯 하면서 서로의 다른 목적을 생각하며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하며 동상이몽을 꿈꾸며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어차피 서로를 믿지 않기 때문에 함께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다. 사회적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특히 협동조합을 두고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적의도가 있지 않느냐는 의심을 먼저 품는 일이 우선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차이를 이야기함은 두려운 일이기에 애써 피하며 서로 비슷한 공통점만 이야기하면서 마치 ‘연대’와 ‘협력’, ‘공동체’가 구성된 것처럼 착각한다. 사회적기업, 사회적경제는 서로의 취향과 관심을 확인하는 상징적 증표처럼 이용되거나 –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것도 상호 용인할 수 있는- 차별성을 잠시 무효화시키는 완충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반복 되는 원인은 우리가 ‘같은 목적’을 가지며, ‘같은 지향의 사람’(혹은 비슷한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같은 사회’(공통된 사회)에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야 한다는 잘못된 착각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취임초기부터 사회통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미 갈라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아무리 국민으로 호명된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국가 체계 아래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무시한 채 ‘사회’라는 개념을 붙이며 상징적인 통합을 시도하려한다. 오늘날 ‘사회’ 혹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라는 개념이 붙는 여러 형태(사회적기업, 사회공헌, 소셜미디어, 소셜마케팅 등등)들은 일관성도 지향성도 없이 무분별하게 소비되고 있다. 이러한 담론들이 증가하면서 발생되는 효과는 ‘사회적인 것’의 개념이 점점 모호해지며 오히려 ‘사회’에 대한 특별한 의심을 품지 않게 되어 점점 사회라는 개념을 기표로 사용하여 공허한 개념으로 만든다. ‘사회’란 말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사회는 구체화되지 않고 추상화되는 마술적 효과가 발생되고 있다.
아무리 국민국가 체계 안에 신체적으로 귀속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단일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계급, 지역, 다양한 관계망 등으로 우리의 생활인식 속에 이미 사회는 분리되어 있다. 이런 사회가 분열적이거나 혼란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통화되거나 분화되는 역동적 과정을 통해 더 많은 다양한 여러 사회(societies)들이 재조직될 수 있는 하나의 사회(Society)를 재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각자가 어느 사회에서 어떻게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앞으로 연재하는 칼럼 ‘사회적인 것’들은 사회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어느 한 개인의 해석이자 입장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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