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과 종이]<헝거게임: 캣칭 파이어>-희망은 어디서 생겨나는가?(31호)

2014년 1월 9일culturalaction
[스크린과 종이]31호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희망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최지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편인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을 보지 않고 <헝거게임: 캣칭파이어>를 보러 갔다. 단지 지인으로부터 전편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그거 <배틀로얄>이랑 비슷하던데?” 지인의 평가 덕분에 헝거게임 시리즈를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고 <헝거게임: 캣칭파이어>를 볼 계획도 없었다. 다만 새로 생긴 필름카메라를 시험해보려 공원에 나간 날, 비가 오기 시작했고 영화나 볼까 싶어서 영화관에 들어갔고 마침 상영시작시간이 맞는 영화가 <헝거게임: 캣칭파이어>이었을 뿐이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나는 이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편인 <판엠의 불꽃>을 다운 받았다.
<헝거게임: 캣칭파이어>는 전편과 후편을 이어주는, 정확히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전편에서 일어난 사건 이후의 상황들을 보여주는데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고 막 클라이맥스에 이를 무렵 후편을 예고하면서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서사적 완결성은 다소 부족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헝거게임 : 캐칭파이어>가 매우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독재국가 ‘판엠’은 총 13개의 구역과 수도인 캐피톨로 이루어 있는데, 캐피톨에 모든 권력과 부가 집중되어 있으며 나머지 지역의 사람들은 매우 빈곤하게 살아간다. 13개 구역의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판엠은 다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매년 헝거게임을 연다. 12개의 구역에서 남녀 한 쌍씩 24명을 뽑아 최후의 1인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는 게임을 진행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사람은 정부로부터 매년 엄청난 상금을 받으며 호화롭게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미디어로 방영된다.
다소 과장되고 만화 같은 설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습을 (다소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12구역은 잿빛으로 어둡고 스산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단지 빈곤한 사람들의 도시일 뿐만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들의 도시,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로 가깝다. 포디즘의 시대는 사람들을 줄 세우고 통제하는 방식, 즉 착취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일에 주력했다면, 포스트포디즘의 시대는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배제’시키는 데 주력한다. 월스트리트 시위 세대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통해 19세기 파리의 모습을 21세기 ‘여기’에 소환했지만, 21세기의 모습은 <레미제라블>보다는 <헝거게임>에 더 가깝다. 기득권층의 입장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다. 단지 그 인간들이 반란을 일으켜 담장을 넘어 ‘이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아주 가끔씩 작은 빵조각을 던져 줄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 빵조각이 바로 헝거게임이다. 우승하면 평생 편하게 먹고 살 수 있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희망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주인공 캣니스가 있다. 캣니스는 1편에서 돌발적인 행동을 하며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헝거게임을 통해 반란군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된다. 하지만 캣니스 또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 중 한명일 뿐이다.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언제든 미디어를 통해 재조작이 가능하다.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이미지만 존재하는 시대인 것이다. 판엠은 반란군의 희망을 꺾고 캐피톨을 향한 분노를 캣니스에게 돌리기 위해, 캣니스가 친정부적인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조작 가능하지만 ‘진심’은 조작 불가능하다. ‘보여지는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려고 할 때, 즉 스스로 인간성을 회복할 때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액체 근대’로 명명하면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액체화 되었다고 진단했다. ‘액체근대’사회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는 매우 가볍다. sns에서 친구를 맺는 것처럼, 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친구 삭제’가 가능하다. 이런 사회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연대란 매우 요원하다. 병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소비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는 시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진정한 연대란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쉽진 않겠지만 변화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고루하고 재미없게 들리겠지만, ‘진심’ 또는 ‘진정성’ 같은 것들이 변화의 열쇠가 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의지의 행위, 즉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겠다는 결단 또는 약속 같은 것이라고 했다.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당신의 원래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며 이해하겠다는 행위, 함께 버티며 곁에 있겠다는 행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캣니스를 변화의 희망으로 여긴 것은 멸종해가는 ‘인간성’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안녕들 하십니까?”하고 안부를 묻는 대자보를 붙이고 있다. 이 현상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어떤 양상으로 변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는 좀 더 조직적인 차원의 움직임을 원하겠지만, 글쓴이는 그저 이대로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희망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진짜 적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 것.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찔러 죽이는 게임을 그만두고 너와 내가 모두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으면 불꽃은 저절로 솟아오를 테니까. 그럼 모두들,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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