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게임 셧다운제, 게임포비아, 팬옵티콘 사회 / 이동연

2012년 9월 19일culturalaction

[칼럼]창간호

게임 셧다운제, 게임포비아, 팬옵티콘 사회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최근 인터넷 실명제가 위헌판결을 받으면서 게임 셧다운제의 위헌 여부도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헌법 재판소는 인터넷 실명제가 게시판 이용자의 익명 표현의 자유,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의 언론 자유, 게시판 이용자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이라는 3가지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판결했다. 헌법재판소는 “공익적 목적을 위해 입법자가 기본권을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때 그 정도가 과도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특히 헌법재판소는 인터넷 실명제의 효과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판단했다. “인터넷 실명제 이후에도 악성 게시 글이나 댓글이 의미 있게 감소하지 않았고”, “표현의 주체나 기간, 내용을 떠나 과도하게 익명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으며”, “일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실명제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위헌의 중요한 사유이다.

인터넷 실명제의 위헌 판결은 현재 위헌 소송을 벌이고 있는 게임 셧다운제와 상당히 유사한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 게임 셧다운제 역시 개인의 게임을 할 수 있는 자율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데다, 셧다운제 실시 이후에도 청소년들의 게임이용이 크게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임 셧다운제는 인터넷 실명제처럼 과도한 개인의 자율권의 침해와 법적 실효성의 차원에서 위헌적인 요소를 안고 있다. 게임 셧다운제는 일정한 시간 내에 청소년들의 게임 이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점에서 인터넷실명제보다 더 심각한 위헌적 요소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왜 여성가족부는 과도하게 청소년들의 게임 이용을 규제하는 것일까?

위헌적인 요소를 감수하면서까지 게임 셧다운제를 관철시키려는 것은 게임에 대한 기성세대의 사회적 포비아를 드러낸다. 게임 셧다운제는 어떤 주체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소년에 대한 어른들의 고정된 시선이 그것이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노동의 윤리와 가치를 중시하는 주체, 자녀들의 성공을 기원하는 주체, 규범화된 삶을 강요하는 주체의 시선이 작동한 결과이다. 게임 셧다운제는 근대적 규율권력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게임이라는 상호작용적이고 탈근대적인 매체에 가해지는 규율권력은 ‘감시와 처벌’에 기반 한 근대적 권력이다. 푸코에 의하면 근대 규율권력은 잘못을 저지르면 참수나 태형과 같이 신체에 직접 형벌을 가하는 중세와는 다르게 죄수를 감옥에 가두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일정한 훈육을 통해 죄수들을 교화하여 후에 선량한 노동주체로 전환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감옥이라는 근대적인 훈육 장치는 죄수들을 전방위적으로 감시하고 이들의 일상을 통제하여 훈육하는 방법들을 개발하는데, 대표적인 방법이 ‘팬옵티콘적인 감시’이다. 팬옵티콘적인 감시는 감시자 한 사람이 다수의 죄수들을 한 번에 감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1인칭 시점의 감시이며, 원근법적인 시각성을 보유한다.

흥미로운 점은 게임 셧다운제를 밀어붙이려는 심리적 기제가 이러한 팬옵티콘적인 감시의 방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청소년 게임셧다운제나, 게임쿨링오프제와 같은 게임을 규제하는 훈육 방식의 기제들은 근대적인 물리적 공간의 형태를 가진 감옥에서의 팬옵티콘적인 감시와 다르게 탈물리적이고 탈공간적인 감시체계를 갖는다. 온라인 중심의 오늘날의 게임은 컴퓨터상에서 모든 감시가 가능하며, 기술적 통제 역시 가능하다. 셧다운제, 쿨링오프제도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기술적 통제 중의 하나이다. 게임에 대한 감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가능하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게임 좀 그만하고 공부 좀 해라”이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사라지면 부모들은 아이가 게임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감시의 눈초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미디어 역시 어떤 반인륜적, 청소년 범죄가 일어날 시에 그 범죄자가 혹시 게임과몰입에 빠지지 않았는지 관찰하거나 유도 심문한다. 게임과 게임의 행위에 대한 감시는 그런 점에서 전방위적이고 팬옵티콘적이고 원초적이다. 국가의 게임에 대한 감시 장치들은, 보수언론들이 취하는 게임에 대한 히스테리는 게임 이용자들, 특히 게임 과몰입자들을 감옥의 수감자로 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게임 셧다운제는 그런 점에서 게임을 감시하기 위한 심리적 기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 셧다운제가 쿨링오프제로 청소년들의 게임이용을 감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청소년들은 심야에 게임을 하기 위해 부모들의 ID를 도용할 것이고, 쿨링오프제가 실시되어도 다른 ID를 중복 재생해서 게임을 지속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게임에 가해지는 규제와 통제장치들은 결국 게임을 완전하게 감시할 수 없는 것일까?

팬옵티콘적인 감옥의 감시체제가 아무리 강하게 작동되어도, 그 감시의 시선을 피해 다른 짓을 할 수 있는 수감자들이 있듯이, 게임에 대한 완벽한 감시 역시 불가능하다. 게임 이용자들은 게임을 통제하면 할수록 게임을 할 수 있는 다른 대안들을 만들어 낸다. 게임을 규제하려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게임이한 놀이를 법으로 완전히 금지하지 않는 이상, 그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왜 이러한 감시의 장치들을 무리하게 도입하려 할까?

그것은 게임에 대한 어떤 공포를 제도와 법이라는 규제 장치로 너무 쉽게 해소하려들기 때문이다. 게임포비아는 결과적으로 게임을 감시하고,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훈육하는 장치들을 개발하게 만들었다. 게임등급이 가장 일반적인 장치이고,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심지어는 게임을 마약류로 분류하려는 시도들도 감지되고 있다.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같은 장치들은 많은 시민들, 특히 부모세대들에게 합리적인 규제로 인식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게임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숙면을 취해야하는 밤에는 피하고, 게임을 장시간 하는 데 따른 신체적 피로도를 고려해 적당히 하라는 조치들은 표면적으로 보면, 합리적인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장치들이 수행되는 과정과 방식을 보면 일방적이고 폭력적임을 알 수 있다. 규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셧다운'(shut down)이나 ‘쿨링 오프'(cooling off)와 같은 규제방식은 어떠한 예외도 두지 않는다. 12시가 되면 무조건 청소년들은 게임할 수 없고, 2시간이상 게임을 지속할 수 없다. 이러한 규제 장치들을 적어도 이 규제의 시간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고, 고려될 것도 없으며 일방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규제장치들은 방법적으로는 시간을 규제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개인의 신체를 훈육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훈육 장치들은 감시받는 자들의 미시권력에의 의지로 인해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

게임포비아는 결국 이러한 규제 장치들을 통해서 포비아의 심리를 해소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포비아의 심리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억압적인 의식의 극단적 형태이다. 포비아의 두 가지 심리상태인 두려움과 혐오감은 짝패이다. 게임의 규제장치들, 훈육장치들은 결국 게임포비아를 생산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게임을 싫어하는 어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제발 뭐든 지 법으로 규제해서 우리 아이 게임 좀 그만하게 만들어 주세요.” 청소년 게임셧다운제나 쿨링오프제는 결국 청소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들을 위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게임포비아가 다수라면, 게임필리아,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수라는 점이다. 보통 포비아의 발생은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려는 히스테리컬한 심리 기제에서 비롯되지만, 게임포비아의 경우에는 다수가 다수에 대한 공포심과 혐오감을 드러낸다. 게임포비아의 발생원리는 그런 점에서 아주 특이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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