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파티엔스: 『사회학적 파상력』(김홍중)

2017년 5월 30일culturalaction

[문화사회연구소 칼럼]

호모 파티엔스: 『사회학적 파상력』(김홍중)

이종찬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이 글은 계간 《황해문화》 94호(2017 봄)에 게제된 글입니다.

 

김홍중을 일컬어 ‘지적 대식가(大食家)’라 표현한 평자의 언급이 기억난다. ‘대식가’라는 단어의 어감은 우리에게 묘한 해석적 울림을 주지만, 한편으로 김홍중의 글을 읽을 때 일반적으로 접하게 되는 하나의 특별한 즐거움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기도 한다. 그 즐거움이란 그가 자신의 작업에서 참조하고 있는 문헌들의 방대하고 꼼꼼한 정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론적 전거로 저자가 원용하는 텍스트들의 풍부한 커버리지를 통해 독자들은 해당 주제와 관련한 담론적 지형도를 엿볼 수 있으며 또한 자신만의 2차적・파생적 독서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또한 그의 작업들을 통해 많은 배움의 계기를 얻을 수 있었던 독자들 중 하나임을 먼저 고백해둔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김홍중의 작업 전체를 관류하는 핵심 열쇳말이다. 개별적으로 써온 열세 편의 논문들을 묶어 2009년 겨울에 발간했던 그의 첫 저서 『마음의 사회학』을 통해 그는 이미 자신의 작업이 이른바 ‘마음의 사회학’이었음을 천명한 바 있다. 그는 유명한 ‘혜능 선사의 깃발’ 에피소드를 빌어 ‘마음의 사회학’이 지향하는 바를 들려주었다. 나부끼는 깃발을 앞에 두고 논쟁을 벌이는 두 스님이 있다. 한쪽은 흔들리는 것이 깃발이라고, 다른 한쪽은 바람이라고 주장한다. 혜능은 그러나 둘 모두 틀렸다며, 흔들리는 것은 그저 그들의 마음일 뿐이라 선을 긋는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김홍중은 한 발 더 나아가 이 에피소드에서 두 스님의 ‘마음의 공통성’에 주목하였다. 흔들리는 하나의 깃발 앞에 선 두 스님의 마음이 실은 불도(佛道)라는 하나의 체제 속에서 만들어진 ‘공통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찬찬히 되짚어본 것이다. 그를 통해 그는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 사유하는 물건이 아니라 공유하는 매체”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김홍중의 ‘마음의 공통성’ 테제는 ‘마음’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통념 한 가지를 효과적으로 논박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음’이 놓인 자리가 “개체의 내면에 존재하는 심적 표상, 정념, 병리적 현상의 일반적 무대”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각개성(各個性) 운운하는 시정 담론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사회학적 파상력』은 『마음의 사회학』에 이은 김홍중의 두 번째 저서로 저자가 2008년부터 2016년까지 발표한 논문들을 세 가지 키워드로 정돈하여 펴낸 책이다. 이 지면에서는 그의 화두인 ‘마음’ 개념을 정교화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이론적 작업들을 묶은 마지막 3장은 제외하고 ‘꿈’과 ‘청년’에 주목한 1장과 2장을 중심으로 논의를 끌어가보고자 한다.

『사회학적 파상력』의 첫 번째 키워드는 ‘꿈’이다. ‘꿈’이라는 단어만큼 우리네 동시대적 시공간에서 말의 인플레이션을 심하게 불러일으킨 것이 또 있을까. 때문에 이내 해묵은 피로감이 엄습해오지만, 김홍중이 주목하는 ‘꿈’은 수없이 강요되어 어느새 내면화된 불굴의 초극(超克) 정신이나 자기계발 주체의 마취된 의지 등 이제는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따분하고 지루한 혐의를 너끈히 비켜나간다. 대신 그는 꿈이라는 주제에서 긍정과 부정의 계기를, 보다 구체적으로는 ‘절제하는 긍정’ 그리고 ‘비관적이지만 염세적이지 않은 부정’의 양가적 계기를 동시에 엄중히 응시한다. 통념과 달리 꿈은 단순히 미래시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꿈에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세 개의 시간대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꿈꾼 바 있었으나 현실화되지 못한 채 잠재적으로 고여 있는 ‘과거’의 시간, 그리고 미완의 가능성이 비로소 재-점화될 ‘미래’의 시간. 마지막으로 그 두 시간, 과거와 미래의 시간과 함께 가장 문제적 시간인 ‘현재’의 시간이 있다. 현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인 시간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everything) 혹은 ‘무언가’(something)인 시간이 될 수 있다. 이 논리적 형용모순이 그러나 상황적・맥락적으로 문제없이 용인될 수 있는, 실로 묘하고도 기이한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김홍중의 관심은 현재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머무는 데 있지 않다. 그는 현재가 ‘모든 것’이나 ‘무언가’인 시간이 되길 꿈꾸는데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연적 계기가 요구된다. ‘몽상의 모멘트’와 ‘파상의 모멘트’가 그것이다. 각각 꿈을 ‘꾸는’ 계기와 꿈을 ‘깨는’ 계기.

‘파상’이라는 표현에 특히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파상’(波像)은 “기왕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들이 충격적으로 와해되는 체험”을 뜻하는 저자 특유의 조어(造語)로서 여기에 김홍중의 ‘꿈’ 개념이 지닌 독특한 위상학이 담겨있다. 그는 말한다. “꿈을 연구한다는 것은 몽상의 모멘트와 파상의 모멘트가 동시에 포착되어야 한다.”고. ‘몽상’이 꿈을 꾸는 것이라면, ‘파상’은 역으로 꿈(像)을 깨는(波)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상반된 두 계기가 어떻게 동시에 가능할 수 있을까. 김홍중은 이를 ‘가위눌림’이라는 비유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꿈에서 우리는 이따금 서늘한 가위눌림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이것이 파상의 체험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깨어남과 꿈 사이의 회색지대”인 이 가위눌림은 꿈을 꾸는 이로 하여금 철저한 불안정의 체험을 강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김홍중은 이 가위눌림의 체험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거기에는 환멸과 희망이라는 모순된 두 계기가 동시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환멸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는 힘”(파상) 그리고 “희망의 근거를 그 파편들 속에서 찾아내려는 자세”(몽상). 이 두 가지 계기가 김홍중이 말하는 ‘꿈’ 개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상상력의 한계지점에서 나타나는, 능력과 무능력의 미분화된 체험 형식”이다. 김홍중의 ‘꿈’은 근거 없는 낙관이나 중2병적 염세, 그 어느 쪽의 함정에도 빠지지 않고서 독특한 의미론적 울림을 가져다준다. 가위눌린 자의 저 불안한 존재론적 떨림의 상태를 견디는 힘에 저자는 오래도록 시선을 거두지 않으려 한다.

『사회학적 파상력』의 두 번째 키워드는 ‘청춘’이다. 김홍중은 출발점은 다음과 같다. ‘청춘’과 ‘청년’은 왜 분리되었을까. 아니, 거기서 한 술 더 떠, 어쩌다가 경제력을 갖춘 장년과 노년이 청년의 자리를 점유하여 청춘을 전유하는 기괴한 모양새가 돼버리고 말았을까. 김홍중이 보기에 오늘날 청년세대는 “생물학적으로는 ‘청년’이지만 사회문화적으로는 ‘청춘’을 구가하지 못하는, 매우 독특한 집단”이다. 이들의 존재론적 처지를 함축하는 핵심기표가 ‘서바이벌’이다. 한국어 ‘생존’이라는 어휘를 제쳐두고 저자가 굳이 그것의 영문 번역어인 ‘서바이벌’을 택한 이유는 다분히 의도된 선택이다. ‘생존’이 “목숨의 구제”라는 축어적 의미 수준에 그친 뉘앙스가 강하다면, 그가 ‘서바이벌’이라는 말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내고자 한 의미는 “경쟁상황에 잔존하여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서바이벌은 “‘살아’남는 것이라기보다는 살아‘남는’ 것”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청년세대가 꿀 수 있는 꿈의 평균적 최대치가 ‘서바이벌’이라는 것은 그들의 꿈이 실은 악몽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방증으로 고스란히 읽힌다. 그 결과 청춘을 박탈당한 청년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게 되는데, 김홍중이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하는 것은 그가 ‘탈존’이라 칭한 존재양태다. ‘탈존’(脫存). 말 그대로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 ‘사라지는 것’을 꿈꾸는 마음의 지향”. 이 같은 극단적 태도는, 홀로 존재하겠다는 ‘독존’(獨存) 그리고 함께 존재하겠다는 ‘공존’(共存) 그 어느 쪽의 입장에도 속하지 않는 혹은 못한 이들이 막다른 골목에서 택하게 되는 극한적 (비)선택이다. 다만 김홍중은 탈존주의적 양태 속에서 잘 가시화되지 않는 적극적인 계기를 구제해낸다. 그는 생존주의와 탈존주의의 문제를 이를테면 ‘생존이냐 소멸이냐’ 식의 이분화된 틀로 바라보는 것에 강하게 저항한다. 그것은 우리의 눈을 가로막는 오도된 거짓 프레임에 불과하다. 생존주의와 탈존주의의 진정한 이항적(binary) 구조는 “살아‘남기’”와 “살아 ‘사라지는’ 것”의 문제다. 꾸역꾸역 어떻게든 살아남아 별별 더러운 꼴을 다 보고야 마는 잉여의 존재로서 ‘잔존’(殘存)이거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잃지 않고 사라지는 존재로서 ‘탈존’이거나. 탈존의 품행을 지닌 자에게는 지켜야 할 “최후의 존엄”이 엄존한다.

청년세대의 ‘탈존’주의적 양태에 김홍중이 주목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 듯 짐작된다. 「탈존의 극장」이라는 글에서 그는 <2014 정림학생건축상>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여했던 자신의 인상적인 경험을 술회하고 있다. 응모학생들은 가상의 한 사람을 건축주로 정하여 (역시나 가상으로) 면담한 뒤 그를 위한 공간을 기획하도록 요청받았다고 한다. 김홍중은 응모작들 중 ‘안토니오,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작품에 각별히 주목한다. 자살을 도모하는 건축주가 있는데, 그는 자신의 죽음 뒤 남겨질 자신의 시신을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다. 다시 한 번 환기되는 ‘최후의 존엄’이라는 문제. 건축주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매장할 수 있는 건축적 장치”를 의뢰하고, 건축가는 마침내 그를 위한 ‘탈존의 공간’을 설계한다. 김홍중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이 설계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이와 같은 탈존적 삶의 영위에 대해 우리들은 어떠한 평가를 내려야 하는지는 역시 쉽지 않은 문제다. 다만 한 가지는 언급해두고 싶다. 오늘날 탈존의 삶은, “생존(서바이벌)하라!”는 이 시대의 낡고 해묵은 정언명령에 대한 주목할 만한 안티테제로서 곱씹어볼 만한 한 가지 중요한 윤리적 질문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2009년 『마음의 사회학』 출간 당시 서동진은 이에 대한 한 응답으로 「환멸의 사회학」이라는 서평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자유주의자에게 87년 체제의 실패를 바라보는 감정은 환멸감이다.” 하지만 서동진이 보기에 애초 김홍중의 ‘환멸감’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누락된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적대’(antagonism)다. 물론 여기서 ‘적대’는 맑스주의의 계급적 의식에 기반한 적대를 가리킨다. 따라서 ‘마음의 사회학’이란 결국 “적대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몸짓”이 아니겠느냐고 서동진은 비판적으로 결론 내린다. 당시 필자의 지인 중 한 명은 서동진에 의해 김홍중이 사상적・정치적으로 강제 커밍아웃을 당했다며 편치 못한 감정을 내비쳤다. 필자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정치적 좌표화 과정에서 바라볼 필요성 또한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동시에 한다. 다시 말해 서동진의 글을 ‘강제적 커밍아웃’으로 단정 짓기보다는 사상의 공론장에서 보다 정확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나누기 위한 정치적 좌표 설정의 일환으로 해석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회학적 파상력』에는 흡사 서동진의 서평에 대한 응답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어 묘하게 눈길을 끈다.

김홍중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테제를 내놓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비판’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파상은 비판이 아니다. 꿈은 비판될 수 없다.” 뒤이어 그는 자신의 입장을 보다 상세히 이어나간다. “파상력은 사회를 특정 관점에서 디자인하려 하거나, 통치하려 하거나, 조직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인 것이 끓어오르며 새로운 길을 뚫는 장소, 그 어딘가에서 예기치 않은 희망의 씨앗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성되는 곳을 증언하기를 소망한다.” 김홍중은 작은 하나의 씨앗, 그 가능성에 주목하겠다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 작은 “세부(디테일)”에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총체성이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홍중의 보편성은 ‘비판’이 아니라 “미소한 단위 속에서 전개되는 파괴와 생성의 드라마에 내포된 보편성과 특이성의 분리할 수 없는 결합”에 있다.

아우슈비츠 생환자인 정신의학자 빅토르 프랑클은 1951년 「호모 파티엔스」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는 받아들이고, 피해 입고, 괴로워하며 녹아든다는 의미를 담은 라틴어 ‘patior’에서 나온 말로 ‘괴로워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짧은 글에서 빅토르 프랑클은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랄 수 있는 이성적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의 대척점에 이 ‘괴로워하는 인간’을 위치시키고 있었다. 김홍중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또한 ‘통감하는 자’이기도 하다. 통감(痛感)은 “‘고통스럽게’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것, 타인들의 감정에 피할 수 없이 연루되어 고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 출신 미국 망명지식인 한나 아렌트는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단독자의 세계를 등한시 여기는 당대 사회학의 경향적 풍토를 비판할 때 ‘분노도 열정도 없이’(sine ira et studio)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전해지는데, 이는 김홍중의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여겨진다. 지식은 대상의 착취가 아니라 “대상과 주체의 상호전염”이라 그는 확신한다. 김홍중은 ‘호모 파티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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