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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41] 투쟁시작과 문화예술인 행동 –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와의 연대기(2)

2018년 4월 2일culturalaction

신유아 / 문화연대

 

(대표사진: 노순택)

 

콜트콜텍이 문화예술인들과 연대를 통해 투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07년이다. 그 출발은 시인이었다. 그리고 시인의 제안으로 문화연대가 연대를 시작했다. 문화연대 네트워크 안의 예술가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호소는 순식간에 힘을 받기 시작했고 사진가, 뮤지션, 다큐감독, 시각미술인, 생활창작자들로 점점 확산되어갔다.

2007년 어느 날 송경동 시인은 문화연대 활동가들에게 콜트콜텍기타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했다. 일단 대전 콜텍 공장에 한번 가보자고도 했다. 만화로 투쟁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만화가와 함께 동행한 콜텍 공장. 공장 앞마당에는 농성천막이 있었고 건물은 식당을 빼고 모두 암흑이었다. 뽀글이 머리를 한 노동자 아저씨의 안내로 어두웠던 공장 안에 작은 전등이 켜지고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 공장의 시설물들은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고 부품들은 그대로 나뒹굴었다. 한쪽 구석엔 지금이라도 세상 밖으로 나가 멋진 기타리스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완성품 기타도 있었고, 도색반이 스프레이 칠을 하던 곳에는 아직도 염료의 색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당장이라도 기계를 돌리면 바로바로 완성될 듯한 기타의 곡선이 울고 있었다.

그리고 2008년 콜텍 지회장 이인근이 양화대교 아래 철탑 고공농성을 하던 어느 날 문화연대는 사진 찍는 노순택에게 콜트콜텍의 이야기를 전했고 그는 곧바로 콜텍 공장으로 내려갔다. 그는 공장의 어둠 속에서 노동의 흔적을 찾아 카메라에 담았다. 콜텍지회장 이인근의 고공농성과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의 투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후 그의 사진은 시 쓰는 송경동의 글과 함께, 그리고 많은 문화예술인들과 활동가들의 릴레이 기고를 통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노순택의 사진은 콜트콜텍의 농성이야기, 부당해고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한 모든 웹자보의 사진으로 쓰이기도 했고, 콜트콜텍기타노동자들을 위한 1주일간의 콘서트를 기획하면서 홍대 앞 클럽 빵에서 사진으로 보는 기타노동자의 전시로도 기획되었다. 이 사진들은 다시 영상작업으로 제작되어 저녁 문화제에서 상영을 했다. 사진가와 시인과 노동자의 만남이다.

 

(사진 노순택)

(사진 노순택)

(사진 노순택)

다큐감독과 뮤지션의 만남도 있다. 2009년 콜트콜텍기타노동자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제작해 달라는 제안을 선뜻 받은 김성균 감독은 <기타이야기><꿈의 공장> 등 두 편의 다큐를 제작하였고 이 다큐는 각종 영화제와 공동체 상영으로 콜트콜텍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문화연대는 또한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와 기타를 사용하는 뮤지션과의 만남을 조직했고 뮤지션들의 반응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기타가 악덕자본가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홍대 인디뮤지션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홍대 클럽 빵 사장의 도움으로 매달 콜트콜텍기타노동자와 함께하는 콘서트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기타노동자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리기 위해 문화연대는 <썸머모던락페스티발>을 기획하고 함께 할 뮤지션들을 섭외했다. 29팀의 밴드가 참가했으며 페스티벌 부대행사로 김성균 감독이 제작한 <기타이야기> 와 노순택 사진가의 사진이 전시되었고 홍대 앞 예술시장 프리마켓 작가들은 기타를 주제로 한 창작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다. 콜트콜텍기타노동자들에 대한 음악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지지와 연대가 어우러지는 자리였다. 이후 뮤지션 연대는 점점 늘어났고 홍대 클럽 빵에서 연대 공연한 팀만 300여 팀이 넘었다. 이 연대는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음악으로 생활하는 홍대 인디뮤지션들의 생활 또한 매우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는 띵가띵가 놀면서 자기 좋은 일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의 노동이 소중한 만큼 기타를 치는 뮤지션의 노동 또한 소중한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노동력을 인정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은 서로에 대해 모르고 살았다. 투쟁이 아니었다면, 연대가 아니었다면 결국 제작노동자와 사용노동자는 모르고 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서 남이 일이라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노동자의 경제적 구조보다 더 구조적인 열악함에 놓인 사람들이 예술가들이다. 낮에는 음악과 무관한지만 생계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밤에는 공연을 위해 끊임없이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 이들은 서로를 연대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를 위로했다. 기타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멋진 연대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연주를 듣는 사람들 모두의 마음을 투쟁현장으로 이끌었다.

(사진 조재무)

(사진 조재무)

당사자 투쟁의 방식은 늘 같았다. 기자회견 하고 몸싸움하고, 농성장을 만들고 연대를 호소하고, 동의를 얻기 위한 현수막을 걸고, 일인시위 같은 피켓팅도 한다. 저녁이면 문화제를 한다. 발언 위주의 진행과 문화예술가들이 양념처럼 공연을 한다. 투쟁영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제작퍼포먼스를 한다. 어느 농성장을 가도 투쟁 대상만 다를 뿐 형식은 대부분 똑같다. 사람들은 농성현장을 지나며 무엇을 위해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냥 투쟁하는 곳, 농성하는 곳으로 인식할 뿐이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방법에 대한 고민만 있을 뿐 대안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조금씩 새로움에 도전하고 시도해 볼뿐이다. 새로운 도전과 시도는 당사자들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2008년 12월, 음악인들은 홍대 앞 클럽 빵에서 일주일간 콜트콜텍기타노동자를 위한 헌정콘서트를 열었다. 공연장이 확보된 상황에서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이 기타를 연주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노동자들은 스스로 연주하고 공연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어느 해 가을. 콜트콜텍기타노동자들은 밴드를 만들기로 했다. 베이스기타 김경봉, 까혼 임재춘, 기타 및 보컬 이인근, 기타 장석천으로 맴버를 구성한 콜트콜텍기타노동자들은 기타를 연주하는 노동자로, 뮤지션으로 연대의 폭을 넓혀갈 준비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기타노동자들이니까 당연히 기타를 잘 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이들은 기타를 제대로 연주해 본 적도 없다. 기타를 만들 줄은 알지만 공장운영방식이 라인 작업이다 보니 전 공정을 다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콜트콜텍기타노동자들은 “아무래도 악기노동자들의 투쟁이니 뮤지션들과의 연대가 활발했는데 ‘기타노동자가 기타도 못 치면 어떡하느냐’ 이런 얘기가 하도 자주 나와서 아예 밴드를 만들어 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계속]

(사진 정택용)

(사진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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