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연구소 칼럼]

비누광고와 인종주의

김주환 /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미용 상품 광고들은 자본주의가 인종적 표상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상이다. 그중 특히 Pears’ 비누 등 많은 비누 브랜드의 광고들은 이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들이다.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던 19세기 초, 비누 회사들은 자사 비누의 광고에 식민지 비유럽 인종의 표상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문명의 탄생> Pears 비누 (1886년)

위 그림은 <문명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1886년 Pears 비누 광고이다. 검은 피부의 한 원주민이 난파선에서 떠밀려온 비누 상자를 발견하고 있다. 그림의 하단에는 “비누의 소비는 부, 문명, 건강, 인간의 순수성의 잣대”라는 자막이 쓰여있다. 비누는 문명을 상징하는 물건이 된다. 더구나 “바다로부터 온 메시지”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비누가 상징하는 문명은 흑인 원주민의 세계 바깥에서 그들의 세계로 전달된 것이다. 흑인 원주민의 세계는 문명의 부재, 야만의 세계인 반면 바다 넘어 유럽은 문명의 세계이다. 결국, 비누의 발견은 곧 야만의 땅에서의 문명의 탄생이다.

아래 그림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백인의 임무를 말한다. “개화(lightening)을 위한 첫걸음은 (식민지 원주민에게) 청결의 미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백인의 임무”이다. 이를 위해 식민지 원주민들에게 비누를 주는 것(또는 파는 것)은 그 첫걸음이다. 중앙의 하얀 제복을 입은 백인 남자가 청결을 위해 비누를 사용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비누는 청결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그림 하단의 자막이 말하듯 비누는 “문명화된 나라들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 보면 성직자는 기독교의 성경 대신 Pears 비누를 흑인 원주민에게 준다. 그리고 흑인 원주민은 무릎을 꿇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비누를 받는다. 무릎을 꿇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비누를 가지지 못해 개화되지 못하고 비위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식민지 원주민은 비누로 표현되는 백인의 이른바 문명, 계몽, 청결의 문화에 복종한다.

<백인의 임무>. Pears 비누 (1899)

위 그림에서 성직자가 원주민들에게 성경 대신 Pears 비누를 주고, 원주민들은 그것을 무릎 꿇고 받는 장면이 시사하듯이, 비누 광고 속에서 비누는 유사 종교적 경외의 대상이 된다. <영국의 정복 공식>이라는 제목이 붙은 1884년 아래 Pears 비누 광고 그림은 Pears 비누가 원주민들 사이에서 어떻게 종교적 경외의 대상이 되는지를 다소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림 하단의 자막을 해석해보자면, 한 종군기자의 보고에 따르면 식민지 건설을 위해 수단에 들어간 영국군은 자신들의 점령지 경계의 큰 검은 바위에 “Pears 비누가 최고”라는 하얀 글귀를 새겨넣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하고 미스테리한 글자가 자연 대상에 새겨지는 유사 종교적 경험을 한 한 무리의 수단 원주민들은 그 글귀의 의미를 몰라 당황해한다. 이들은 이 글귀를 아마도 신의 언어라고 생각하고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숭배하고 찬양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Pears 비누가 최고”라는 “전설”이 만들어진 계기이다. 물론 이때 Pears 비누는 개인위생의 관념, 문명 등의 상징이고, 경배의 대상은 비누를 사용하는 위생적이고 문명화된 서구인들의 생활방식이다.

<영국의 정복 공식>. Pears 비누 (1887)

Pears 비누에서 1884년에 나온 <피부색을 개선하고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제목의 다음 광고 그림을 보자. 한 백인 아이가 흑인 아이를 목욕시켜주고 있다. Pears 비누를 이용해 목욕을 하자 흑인 아이의 피부는 밝은 하얀 피부로 변한다. 그리고 흑인 아이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가 비누칠을 하며 목욕을 하는 것은 몸에 뭍은 때, 세균 등 더러운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이 그림에서 제거되는 것은 흑인 아이의 검은 피부색이다. 검은 피부색은 더러운 것으로, 하얀 피부색은 더러운 것이 제거된 청결한 상태로 표상되면서 피부색 사이에 위계가 만들어진다.

<피부색을 개선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Pears 비누 (1884)

895년 Vinolia 비누를 광고하기 위한 아래 그림 역시 검은 피부색을 더러움의 표상과 연결시키고 있다. 신발을 신지 않은 흑인 아이를 보고 신발을 신은 한 백인 아이가 말한다. “야 더러운 아이. Vinolia 비누로 씻는 게 어때?” 여기서도 검은 피부색은 비누로 박박 문질러서 제거해야 할 더러운 어떤 것이 된다. 1875년 Fairy 비누를 광고하는 아래 그림도 검은 피부색을 더러움의 표상과 연결시키고 있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테마가 덧붙여진다. 오른쪽의 백인 아이는 흑인 아이에게 묻는다. “어째서 너희 엄마는 너를 Fairy 비누로 너를 씻기지 않는 거야?” 검은색 피부를 더러움, 비위생의 관념과 연결시키는 것은 동일하지만, 이 광고에서는 ‘엄마의 역할’이라는 주제가 등장한다.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아이들의 위생을 책임지는 행위자로 소환되고 있으며, 여성은 비누를 이용해 아이들을 씻김으로써 ‘위생’, ‘문명’을 유지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러기 위해서 여성은 소비자로서 비누를 구매해야 한다. 여성은 가정 내 특히 아동 위생의 최고 관리자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비누 판매업자들, 백인우월주의, 위생전문가, 서양문명 우월주의의 파트너로서 동맹관계에 들어간다.

<왜 너희 엄마는 페어리 비누로 너를 씻기지 않는거니?>. Fair 비누 (1875)

지금까지 1800년대 비누 광고에서 드러나고 있는 인종주의, 위생, 젠더 역할, 그리고 자본주의 등의 테마들이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를 간략히 스케치해봤다. 지금 보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광고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재현은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중국 가루비누 즉 세제 회사의 광고에 관한 글로 마무리하자. 한 흑인이 미모의 중국 여인에게 추파를 던진다. 이 여인은 상대가 흑인이라는 점이 못마땅했던지 그 흑인을 세제와 함께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린다. 그러자 흑인은 아시아인으로 바뀌고 여인은 매우 흡족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