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전시로 소통하다

신유아 / 문화연대

 

용산 참사현장은 전쟁터였다. 경찰이 중무장하고 골목을 돌아다니고, 철거용역들은 시시때때로 철거민을 협박했고, 철거민들은 무엇 하나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밥을 먹기 위해 삼삼오오 모이면 멀리서 사복경찰들이 채증을 했고, 그림을 그릴라치면 달려들어 그림을 못 그리도록 고착시키기도 했다. 용역이 시비를 걸어 몸싸움이라도 나면 경찰이 달려와 철거민을 잡아가기도 했다. 철거된 건물에 접근을 막았고, 추모제 시간이면 어김없이 불법집회 운운하며 해산방송을 했다.

용산포차 <아빠의 청춘>

용산 참사현장 뒤편으로 작은 포장마차 가게가 즐비했던 골목이 있다. 용역의 침탈로 하나둘 사라져버린 자리는 을씨년스럽다 못해 흉물스럽기까지 했다. 파견미술팀은 포장마차 공간을 사진관으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사진관은 사진을 찍어주는 공간이 아니다. 사진을 공유하는 전시공간이다. 사진관의 이름은 용산포차 <아빠의 청춘>. 불에 따버린 공간, 철거된 공간에서 나뒹굴던 물건들을 주워 모았다. 냉장고, 액자, 밥통, 거울, 칼도마, 깨진 컵 등 철거의 상처로 남은 것들이다.

용산참사 때 희생된 철거민 유가족의 도움으로 추억의 사진들을 전달받았다. 사진 속 희생자들과 유가족은 젊었고, 사진 속 가족들은 웃고 있었고, 사진 속 이들은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살아있었다.

철거민들의 이야기도 그림으로 그렸다. 전당포 부부, 실내포차, 박물관식당, 충청도집, 보령식당, 류 모텔, 루찌 재화, 무교동낙지, 레아호프, 153당구장, 공화춘, 쌰뜰레, 나리네 반찬, 24시간 편의점, 순천 집, 참 야콘 왕 냉면, 한강 제물포, 책 볼까 비디오 볼까, 우동 포장마차. 용산 철거4구역 사람들의 북적거리는 삶이 보이는 듯했다. 전진경 작가의 이 작품들의 제목은 <내가 투쟁 조끼를 입기 전에는>이다. 1년을 함께 웃고 울고 뒤엉켜 살다 보니 철거민들이 아닌 그냥 나의 모습, 내 이웃의 모습이었다. 철거민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까지는 말이다. 철거민투쟁을 하던 분들과는 언니, 이모라는 호칭으로 불렀고, 언니, 이모들은 전진경 작가가 그린 자신의 초상을 보며 너무도 좋아했다. 누구는 닮았다, 누구는 못생겼다, 누구는 너무 예쁘게 그려 준거 아니냐며 서로의 그림을 품평하며 즐거워했다. 두 달여간 용산 참사현장 전시를 마치고 <용산포차>는 <망루전>과 함께 전국전시를 돌았다. 그리고 2009년 겨울 이 작품들은 용산에서 가게를 하고 살던 철거민 언니와 이모들에게 선물로 전달됐다.

 

낙지樂地교회, 낙지(樂地)도서관

용산참사가 일어났던 용산4구역은 철거된 가게들이 삶을 고스란히 빼앗긴 듯 흉물스럽게 방치되어있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은 길고 지루한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한여름 태양은 철거민과 유가족을 향해 뜨겁게 내리쏘고 있었다. 파견미술팀과 상황실 활동가들은 전시장 <레아>와 사진관 <용산포차>에 이어 새로운 공간을 거점으로 만들기로 의견을 내고 용산4구역 곳곳을 돌아보았다.

용산참사로 희생된 양회성 열사가 운영하던 가게 이름은 <삼호복집>이다. 이 건물에는 ‘무교동 낙지’ 가게가 나란히 간판을 걸고 장사를 하던 곳이다. 유가족의 가게가 있던 곳은 거점으로 만들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명도집행 전이라 세입자 동의를 받으면 누구라도 사용 가능한 공간이었기에 경찰이나 용역과의 싸움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용산참사가 발생한 <남일당>건물은 분향소와 식당으로, 이상림 열사가 운영하던 <레아>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전시장, 미디어센터, 카페, 방송국 공연장등의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제 <삼호복집>은 도서관으로 만들어 볼 계획을 짰다. 철거민들과 소통하고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때이기도 했다.

파견미술팀은 건물 간판을 바꾸기 시작했다. 낙지는 그대로 살려보자. ‘즐거운 땅’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붓을 들고 간판 앞에 앉아 한글을 한자로 바꿔 썼다. 주변 가게들에서 버려진 문짝과 나무들을 주워왔고, 가게에서 사용하던 테이블 등을 이용해 건물 외벽을 꾸미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치우고, 망가지고 부서진 집기들을 들어내고, 철거현장 곳곳에서 주워온 물건들을 깨끗이 닦고 색칠해서 재배치했다. 이와 동시에 용산범대위 상황실 활동가들은 낙지 도서관을 채울 수 있는 책을 후원받기 위해 웹자보를 만들고 홍보했다. 며칠 만에 도서관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책이 후원으로 들어왔고, 낙지 도서관은 조금씩 모습을 갖추어 갔다. 그런데, 멀리서 철거용역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 명 한 명 건물 앞으로 끌려 나온 사람들은 건물 입구에서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 모두 끌려 나왔고 용역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지난 몇 일간 공들여 만든 도서관의 집기들이며 책들을 부수기 시작했고, 외벽간판도 모두 박살 내 버린 뒤 건물 전체를 펜스로 둘러쳐 막아버렸다. 이렇게 또 하나의 공간은 사라졌고, 두 번의 철거를 강제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용산 참사현장에서 경찰은 그저 용역의 뒤를 봐주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철거민들이 용역의 손에 질질 끌려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는 용역에게 저항하다 쓰러지는 철거민에게 참으라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민중의 지팡이 경찰은 어디로 간 것일까.

똥 폭탄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용역들은 나의 두 다리를 손으로 잡고 발버둥 치며 버티는 나를 질질 끌고 나왔었다. 이때 내 머리카락은 바닥을 깨끗하게 쓸고 나왔다. 바닥에 뿌려졌던 똥 폭탄을 깨끗하게 쓸고 나온 내 머리카락은 며칠간 샴푸를 해도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철거민들의 생존을 위한 방패가 온전히 냄새로 남는 날들이었다.

 

(계속)